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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못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소중한 것들이 흘러가고 있다.

by 이경화

도서관에 갔다가 이자람 님의 에세이 <오늘도 자람>을 빌려왔다. 소리하는 사람의 여정과 무대 뒷이야기까지 재미있게 읽으며, '여태껏 이런 무대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네' 아쉬워하고 언제 보러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에 돌아온 남편이 우리가 같이 예술의 전당에서 이자람 님의 <사천가> 공연을 보았다는 거다.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전여친이랑 보러 간 걸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남편을 놀렸다. 남편은 억울해하며 컴퓨터방으로 가서 외장하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만 찾아, 그래~ 내가 보고도 잊어버렸나 보지. 그런데 그런 강렬한 무대를 보고 내가 잊어버렸다고? 말이 안 되는데~"

하면서 아이와 거실에서 놀고 있으려니, 얼마 뒤 서재로 와 보라는 남편의 당당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도 함께 쪼르르 달려가니 정말로 2010년 7월에 공연을 보러 간 게 맞았다. 사진이 떡 하고 남아 있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맞다고 내가 더 잘 기억한다고 우겼다가 망신당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 그건 그렇다 치지만, 그렇게 귀한 무대를 보고 싹 잊어버렸다는 게. 내 소양은 결국 그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니까 좋다니까 따라다녔지 가슴 깊이 느끼고 되새겨보질 않았다. 그날 나는 공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다른 것들에 마음을 쏟았고, 기억도 그 부분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내가 했던 많은 문화 경험들이 그랬다. 그러니까 아직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다.

결국, '엄마는 엄마가 부끄러워서 화가 난다'는 말을 아들에게 남기고 각자 잠자리에 든 밤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에는 잊는 사람들이 나온다. 자신이 무엇을 잊어버린 지도 모르는 사람들. 낮에 아이가 사라져서 찾다가도 밤이 오면 그 아이가 돌아왔는데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 안개가 기억을 빼앗아간다.

읽으면서 우리도 안갯속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아이가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않는 건 안 좋은 기억을 잊고 싶어서라고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반대로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일기를 쓴다.

가브리엘 마르께스는 중요한 건 모두 기억하니까 메모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안 좋은 기억을 잊고 싶어서 기록하는 일을 피하면 좋고 의미 있는 기억까지 잊어버게 되는 것 같다. 현재의 내가 가진 것을 음미하고 어떤 의미인지 되새길 시간을 갖지 않은 채 새로운 것에서 답을 찾으려다 보면, 결국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양분을 주며 가꾸고 싶다.

잘 보냈든 못 보냈든 하루하루는 소중한 경험이고, 결국 가져갈 것도 그뿐이니, 영원한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엄마는 자신이 부끄러워 화가 난다"는 말을 아들에게 남길 순 없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에서 안개는 사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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