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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보다 더 나이 들었을 때

숲길을 걷다가

by 이경화

다와다 요코는 젊은 여성이 가지지 못한 중년 여성의 아름다움을 작품에 자주 묘사한다. 그 아름다움은 외형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내면의 단단함, 지혜, 생기, 용기를 더 강조하는 아름다움이다. 소설 ‘헌등사’에서 할머니는 외딴곳에서 고아들을 돌보며(정보통신망이 마비된 세상에서 그녀 없이는 고아원이 운영되지 않는다. 그녀에게만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간신히 짬을 내어 드문드문 있는(어쩌면 안 올지도 모르는) 열차를 타고 남편과 증손자를 만나러 온다. 그녀의 소설에서 나이 든 여성은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비로소 삶의 주인이 되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지는 면모, 후손에게 도움이 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나는 젊은 여성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려 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뭔가 오해를 할 것 같기도 해서 말하지 않은 적이 많았다. 이를테면 작가한테 그 말을 한다면 내가 작가보다 젊은 것에 우월감을 느끼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칭찬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편집자한테 그 말을 한다면 분명 이제 내가 젊지 않으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나보다 젊은 여성한테 그런 말을 한들 부질없고 큰 실례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젊고 생기 있는 여성은 거의 본 적이 없고 대부분 ‘제물’처럼 괴로워 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몸에 안 맞는 커다란 장식을 어딘가에 걸치고 있으며 약간 진한 립스틱을 어느 날 갑자기 바르고 와서는 다른 사람의 잔인한 심리를 자극한다. 피부는 차가워 보이고 전날 밤을 울며 지샜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희미하게 끼어 있어 자기는 역시 안 된다는 듯 약하게 보여서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받으려 하는 것 같고, 원래보다 순진하게 보여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런 무의식의 연기가 나한테는 아름다움과 멀게 느껴졌고 잔인한 룰처럼 생각돼, 중년 여성을 볼 때마다 어서 저렇게 되고 싶다고 오래 기다렸다.

<다와다 요코, ‘글자를 옮기는 사람’ 중에서>


겨울부터 봄까지 다와다 요코의 여러 글들을 읽으며,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이 조금 억지라고도 생각했다. 사십대 중반을 향해 가는 요즘의 나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가 되어, 고민만 늘어간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발밑에 쌓여 있고, 헤쳐갈 수 없는 미래는 막연히 펼쳐져 있어서 우울하고 두렵다. 늙어가는 부모님은 도움과 사랑을 바라는데, 내 아이 또한 크고 있다. 나는 뭔가가 되지 못한 채 못난 딸, 부족한 엄마, 며느리로서 지구에 살아 있는 것이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너무나 빠르고, 나는 속절없이 늙어 간다.

며칠 전 나는 이런 우울한 기분을 떨치려고 숲길을 걷고 있었다. 답이 없는 답을 찾으려고 머리는 계속 복잡한데, 멀리서 나이 든 여성 세 명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엄마 또래일까, 좀 더 어릴까. 누구를 험담하려 속삭이지도, 자기 자랑을 하거나, 돈 문제로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그저 나긋나긋하게 일상을 나누는 말소리가 걸음 소리도 안 나는 숲길을 따라 내게 들려왔다. 문득, 내 마음이 밝아졌다. 그녀들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살아냄으로써 안에 채워진 생기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세상과 관계 맺는 방법을 알게 된 여유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풍겨져 나왔다. 나도 살다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장 예쁜 나이에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은, 우리의 잘못이나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다. 숲길을 벗어나면 혼돈스런 세상이 펼쳐지고, 우리는 다시 내 눈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되니까. 그러나, 희망을 가지기로 했다. 지금보다 어리고 시간이 더 많을 때 다지지 못한 삶의 토대를 지금여기서부터 다지며, 내게 주어진 돌봄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아야 겠다고. 나무가 굵어지는 것은 더 강한 바람을 견디기 위함이듯, 더 나이가 들어도 삶은 여전히 어렵고, 돌봐야 할 더 늙은 부모, 손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다가오는 시련을 어질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오늘 본 여성들처럼. 그렇게 숲길을 걷고 있는 나이 든 나를 떠올렸다.

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가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무수히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건네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는 할 줄 모르고

아름다운 눈길만 남기고 떠나 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딱딱해지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몹시 불행했고

나는 몹시 어리석었고

나는 너무나 외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영감님처럼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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