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더 이상 어리지도 이르지도 않은 5년 차 직장인
고난한 하루의 끝에
휴대폰 달력에 적힌 할 일들에
체크 표시를 하며 마무리하는 요즘
하릴없이 비어 있는 날들이 밟혀
괜스레 조급해져 일을 찾던 2년 전의 그는
비지 않은 날들에 쫓겨
날아오는 공을 엇박으로 맞추며 앞으로 가지도
뒤로 빼기도 애매한 곳에 체류 중이다
간혹 가다 일정이 빈 날에 찾아오는 여유
예를 들면, 오늘 같은.
퇴근 시간이 되고 20분쯤 나릿하게 문을 나선다
오늘만큼은 남긴 웃음이 없어서
신발장에서 누군갈 마주할 자신이 없다
곧장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어제 퇴근길에 봤던 소설책을 꺼내든다
보기 전, 앞으로 한 번 뒤로 또 한 번 쓰다듬는 의식
새로 산 북커버가 썩 맘에 드는 눈치다
익숙한 구절 앞에 시선을 멈춰 서서
머릿속에 그려 놨던 그림과 맞는지 겹쳐본다
73.9% 일치.
26.1%는 집중력 이슈로 천연스레 패스
그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간다
체크 표시 마냥 분명하지만 뚝뚝 끊기는 하루 속에서
어제와 오늘을, 오늘과 내일을, 어제와 내일을
붙잡아주는 책 한 권
느린 속도 탓에 짧으면 몇 주, 길면 달 단위로 넘어가지만
그는 장과 장 사이의 늘임표.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여백이 싫지 않다
오늘의 여백은 내일, 내일의 여백은 모레 채우기
에둘러 이어지다 보면 모자랐던 하루도
틈없이 채워진 날 되어 있진 않을까
밖을 보던 그는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리는 막간의 소리에
빨간 벨로 화답하며 이내 하던 생각들을 현실로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