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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표

쉽게 쓰이고 지워지는

by 상아

쉽게 지워지는 이름이 있다.

오전 8시 15분, 너도나도 어디론가 바삐가는 월요일 아침. 우수수 쏟아져 나온 학생들이 초록색으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넌다.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다니 이제 교문에서 잡지도 않나?'. '복장 단속 할 일 없는 학주(지금의 생활부장 선생님)는 어떤 기분이시려나..'. 영양가 없는 말들을 주고 받으며 눈을 떼려던 그때, 학생들의 왼쪽 가슴팍의 노오란 글씨가 눈에 띈다. 안감을 대서 이름표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요즘 그렇게 강조하는 개인정보 보호의 일환일 것이다.


이외에도 실명을 밝히지 않고 일명 부캐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어느순간 등장했다.

방송인 유재석의 트로트 가수 버전 '유산슬'부터 시작해서

동백꽃 필 무렵, 폭싹 속았수다를 집필했지만 필명만 알려진 '임상춘' 작가까지

미지의 대상에게 인간은 원초적인 호기심을 품는다.

영화 속에서 한밤 중 블라인드에 비친 실루엣이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기심을 말할 때, 신이 만든 완벽한 인간 여자 '판도라' 이야기를 빼먹을 수 없다. 인간들이 신들의 불을 훔친 것에 화가 난 제우스는 아테네의 지혜와 아프로디페의 아름다움, 헤르메스의 말솜씨를 고루 넣어 만든 여자를 만든다. 그녀를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며 절대 열어선 안되는 상자를 선물한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해 열린 상자 안에서 고난, 질병, 재해와 같은 불행들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가다가, 휴대폰에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링크가 온 적이 있다. 아무리 옛날이어도 악성 코드가 있을 수 있다는 마음에 걱정했지만, '궁금하니까 열어보자'라고 속없이 말하던 아버지가 기억난다. 복잡한 링크 속에는 알 수 없는 살색의 사람들이 엉덩이를 내밀고 있었고, 아버지가 헛기침하며 서둘러 휴대폰을 가져가는 결말로 끝이 났다. 워낙 강렬했기에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모르는 번호로 링크가 와도 열어서 클릭을 해봐야 하고, 강이 꽝꽝 얼었는지 아닌지 두드려서 확인을 해보고야 마는 궁금증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비춰진다. 이처럼 호기심이 흐르는 방향은 때때로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본캐를 숨기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런가하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과학 법칙이나 물고기에 최초로 발견한 이의 이름을 따서 붙이듯

부모, 조부모의 성을 자손들에게 대물림하듯

이 땅에 새롭게 태어나 쓰여진 것들에겐 원작자의 이름이 붙는다.

잘 쓰여진 책 한 권, 눈을 뗄 수 없는 영상 한 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2세'라는 긴긴 이름 대신

저작권을 부여한다.

이름표처럼 권리를 매단 작품들에게는 법칙이 있다.

'절대 상자를 열어봐선 안 될 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쉬운 규칙

[타인의 저작물을 무단으로 도용하거나 배포하면 안 된다.]

잘 숨길 수 있는 세상에서 이 문구는 속절없이 delete 한 번에 삭제되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에 끝까지 남은 것 한 가지, 바로 희망이다.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은 벌로 주었지만

그 모든 것을 버틸 한 가지, 희망

쉽게 지워지는 세상 속에 지키고자 하는 마음 하나쯤 부디 간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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