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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7년 차에 척추측만증

너의 취미

by JULIE K

딸아이의 마지막 영유아 검진 때였다.


"아이의 척추가 많이 휘어져 있네요. 다른 병원에 가셔서 사진 한 번 찍어 보시는 게 좋겠어요."


"네?? 척추가 휘어져 있다고요?"


아이의 등을 한 번 훑어보시던 의사 선생님께서 무겁게 말씀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정기 검진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키는 어느 정도 자랐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급하게 병원을 빠져나온 나는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눈에 띄는 아무 정형외과로 들어갔다.


녀석은 난생처음 엄마와 떨어져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드디어 순서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척추측만증이네요. 평소 자세가 많이 안 좋은 가봐요. 이대로 두면 계속 자라면서 휘게 되니까 자칫하면 보조기를 착용해야 될 수도 있어요."


"보조기요?"


"그러니까... 애기가 아직은..."


그 뒤로 설명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깊은 물속으로 잠수한 것처럼 소리가 불투명하게 울려댈 뿐이다.


"평생 보조기를..."


평생?


애가 아직 어린데 평생이라니?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치료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한창 자랄 때니 평소 생활습관을 바르게 하면서 지켜봐야 한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6개월 뒤에 다시 사진을 찍어보자는 말과 함께...


터덜터덜 병원 문 밖을 나오는데 눈가가 촉촉해졌다. 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딸아이는 활동적이라서 잠잘 때 빼고는 절대 누워있지 않는다. 핸드폰은 갖고 있지도 않는 데다가 그런 건 아예 보여주지도 않았다. 세가 나쁠 일이 없었다.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는 딸아이를 바라봤다. 삐쩍 마른 녀석은 손으로 툭 치면 금방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작고 약하니까 뼈도 힘이 없는 게 아닐까? 뼈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근육의 힘을 길러주면 조금이라도 바르게 자라지 않을까?


왜 나무들도 빛을 따라서 자라지 않나.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있는 나무들은 어쩌다가 들어오는 빛을 따라 구불구불 휘어서 자란다. 반면 빛을 전체적으로 넓게 쬐어 주면 올곧게 쭉쭉 뻗어서 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전전긍긍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대신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요 녀석을 책임져야 할 엄마다. 내가 무너져 있으면 희망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는 것이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근육을 키우는 운동부터 시작해 보자. 누가 와서 툭 쳐도 부러지지 않는 나무가 될 수 있게. 그렇다면.. 지금 녀석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엔 뭐가 있을까?


발레다!



생각보다 실천력이 강했던 나는 집에 오자마자 동네에 있는 발레 학원을 찾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4살 때부터 문화센터에서 하는 발레를 해왔었다. 다양한 신체활동을 하며 뛰어 놀라는 취지로 했었는데 제는 정식으로 가르쳐야 한다.


안 되는 게 어딨어. 뭐라도 해봐야지.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


아이들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다.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한 내면을 갖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딸아이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가감 없이 이야기해 줬다.


이미 병원에서 함께 진료를 봤기 때문에 녀석도 지금 상황에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다. 발레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면 지금 보다 훨씬 좋아질 수도 있다는 말에 딸아이는 용기를 냈다. 아이와 대화를 마친 나는 바로 발레 학원을 등록해 줬다. 그렇게 7살이 된 꼬마는 또다시 발레 슈즈를 신게 되었다.



아이들이 이유 없이 하던 것을 싫다고 한다면 잠시 멈추고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좋다.


처음 발레를 정식으로 배우는 꼬마는 즐거운 마음으로 학원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선생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동작을 가르쳐 주셨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단한 도구들도 적극 활용하여 호기심을 자극했다. 녀석은 학원에서 배운 동작들을 집에 와서 보여주고 길을 가다가도 발레 한다며 나풀나풀 뛰어다녔다.


딸아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 주 2회 빠짐없이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고 오기를 꼬박 2년 넘게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부턴가 녀석은 발레를 배우는 것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휘어진 척추를 세우는 것에 있었기에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르고 달래고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유혹하며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점점 서로를 괴롭히는 일이 되었다,


녀석이 초등학생이 되면서 학교 스케줄 때문에 학원에 가는 요일을 변경했는데 바뀐 선생님이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몸을 쓰는 동작들을 배우다 보니 자칫하면 다칠 수 있어 엄격한 선생님도 괜찮겠다 했는데 녀석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밖에서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계속 혼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끝나고 나서 녀석에게 슬쩍 물어보니 한 명이 잘못하면 다 같이 지적받고 매번 혼난다는 말에 미련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입시 전문반이 아닌 취미 발레인데 꼬마친구들이 이렇게 까지 혼날 이유가 있을까...


녀석의 현재 척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도 더 나빠지지는 않았지만 좋아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대로 현상 유지는 해야 한다는 말에 운동은 그만둘 수 없으니 대신 구청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요가'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발걸음이 가벼운 꼬마


"그래도 여기 오래 다녔는데 서운하지 않아?"


"응! 속이 시원해!"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꼬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녀석을 위하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아이를 괴롭히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때보다 신이 난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경이 복잡해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를 위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나 역시 속이 후련했지만 꾸준히 해오던 것을 그만두게 되니 섭섭한 마음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한 어린이 요가로 전환점을 맞이하는 듯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매달 바뀌는 구성원에 맞춰 기초요가 수업만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이도에 맞춰서 수업이 짜이지 않았고 똑같은 동작만 하는 것은 아이의 흥미를 쉽게 떨어뜨을 뿐 아니라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녀석의 코어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네에 있는 요가원에는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은 없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인근에 있는 발레학원에 문의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너무 먼 곳은 다니기 힘들고 그나마 가까운 곳은 정원이 찼고, 위치가 괜찮으면 시간이 맞지 않던지 주차가 불가했다. 불굴의 의지로 딱 한 곳을 찾았다. 이제 딸아이와의 대화만 남았다.


다행히도 다시 발레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녀석은 발레가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약 5개월 만에 새로운 곳에서 첫 수업을 받은 딸아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발레하고 나니 재밌었다는 딸... 처음엔 낯설어하더니 익숙하게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하고, 바를 잡고 날아다니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진작 옮겨줄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이르케 이르케... 옆으로 가서 돌고 빠드샤~~ 오왼오왼오 수스... 파쎄 돌고... 에페 샤 두 번 포오즈... 1번, 2번, 3번 그리고 나... 여기서 이르케 이르케 오고..."


새로 옮긴 곳에서 발레를 시작한 지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녀석은 친구들도 사귀고 선생님도 잘 따랐다. 학원에서는 상반기, 하반기 때 한 번씩 공개 수업을 하는데 꼬마는 이번에 있을 공개 수업때 하는 작품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동작이 재밌어 보여서 따라 해 봤다. 스텝을 밟고 빙그르르 돌고 포즈를 취하고... 보기에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따라 하니 숨이 금세 차올랐다.


"나 발레에 소질 있는 거 같아. 발레 시켜줘."


신이 나서 철딱서니 없이 딸에게 얘기했는데 찬물 끼얹는 녀석 한 마디,


"아니야. 그 몸매로 못 해!"


"뭐... 뭐야? 엄마가 이래 봬도 왕년에는..."


꼬마는 삐그덕 대며 따라 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내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연신 까르르 웃어댔다.




한 해가 또다시 끝나간다. 올해의 마지막을 장식한 공개수업은 감동이었다. 지난 1년간 녀석은 눈부시게 성장해 있었다. 배운 동작들을 다채롭게 해내는 모습이 대견했다.


예전에 TV에서 봤던 발레공연이 떠올랐다. 백조가 된 주인공은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로 빙글빙글 돈다. 다리와 팔이 하나가 되어 중심을 잡고 돌던 무용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돌면서 주저앉았다. 끝까지 솟구쳐있던 팔 하나의 날갯짓이 큰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 갔다. 매우 인상 깊었 마지막 장면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오늘 딸아이가 보여줬던 공연 역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시작은 자세교정에 있었지만 최선을 다 하고 발레를 진심으로 하는 녀석이 기특했다. 꼬마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하지 않았다.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누가 뭐래도 옆으로 휘지 않는 단단한 나무가 되었다.


녀석에게 평생 착용할 뻔했던 보조기 대신 평생을 즐길 수 있는 건강한 취미가 생겼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성장해 나갈 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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