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이야기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초조했다.
어제 우연히 보게 된 정글 크루즈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도 해야 하고, 길 하나만 건너면 된다지만 차를 빼 주차하고 티켓을 끊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바지런을 떨어도 여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긴 여행에 지친 J는 좀처럼 속도를 낼 기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 재촉을 시작했다.
"가서 티켓 사는 거 까지 생각하면 조금 여유 있게 가야 하지 않아? 조금만 빨리 나갈까?"
"알았어. 준비할게."
다소 무심한 표정으로 J가 대답했다.
사실 크루즈는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다. 하지만 어제 이 도시를 걸어 다니다 보니 막연히 떠나고 싶던 마음이 사라졌다. 조금 더 머물고 싶어졌다. 어차피 오늘의 일정은 올랜도로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꿎은 시계만 계속 들여다봤다. 이미 일찍 일어나 짐정리까지 끝낸 나와 달리, J는 이제야 캐리어에 옷을 하나씩 넣고 있었다.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J가 마지막 캐리어를 잠그자마자, 나는 총알처럼 카드키를 빼 들고 방을 나섰다. 서둘러 체크아웃을 마치고, 여행 내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캐리어를 달달 끌며 차로 달려갔다.
재빠르게 길 건너 공용 주차장으로 넘어가 단숨에 주차에 성공했다. 오늘 있을 크루즈 여행을 위해 주차티켓도 시간 넉넉하게 끊었다.
마침내 마지막 관문인 티켓을 사기 위해, 어제 갔던 매표소로 재빠르게 달려가려던 바로 그때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배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서서히 멀어져 갔다.
아...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눌러보려 했지만 이미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왜 벌써 떠나지? 시간에 맞게 온 거 아니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J는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시간이 됐으니까 출발하는 거겠지? 3분이나 지각했잖아.'
차마 뱉지 못할 말을 간신히 삼켰다. 몇 번이나 시간을 강조했는데도, 결국 간발의 차로 배를 놓쳤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손에 들린 주차티켓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쩔 수 없지 뭐... 이건 그냥 다음 사람을 위해 여기에 꽂아둬야겠다. 누군지 몰라도 오늘 재수 좋겠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할리우드 스타의 집들을 구경하며 흥겨운 음악에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을 나의 모습이, 멀어져 가는 배와 함께 사라져 갔다.
여행을 대하는 방식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은행을 찾던 길에 아침을 먹을 겸 근처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화가 잔뜩 난 나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문을 쾅 열어젖혔다.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이 거칠에 터져 나왔다. 혼자서 씩씩대며 손을 씻었다.
여행을 하며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겪어왔지만, 동반자와의 갈등은 여전히 어렵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늘 망설이게 된다.
다행히도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과 큰 갈등을 겪지 않고 여행을 해왔기에, 이런 상황이 더 낯설고 당황스럽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힘이 들었다.
20대 때부터 나는 자유여행을 즐겨왔다.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내 역할은 늘 가이드이자 총무였다.
처음 떠나는 여행은 설레는 만큼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더 철저하게 사전조사를 했고, 오차를 줄이기 위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모아 계획을 세웠다.
일행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해 완성한 일정표는 대부분 큰 수정 없이 흘러갔다. 예산도 마찬가지였다. 현지에서 꼭 맞게 쓰고 올 수 있도록 계산하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아주 약간의 여유만을 남겼다.
출발 전 예약은 미리 끝내 두었고, 현지에서 쓸 비용은 공금으로 모아 내가 관리했다.
중간중간 사용 내역을 공유했고,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남은 돈까지 모두 털어 공금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함께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여행을 만족스러워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투명해지려고 애썼다.
이것이 나의 여행 방식이었다.
나를 신뢰해 준 사람들과 그 신뢰를 바탕으로 즐거운 추억을 남기는 것.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온 J는 원래 자기 주관이 뚜렷한 친구였다. 외국 생활 하며 성격이 많이 무뎌진 것 같다고, J 스스로도 말하곤 했다. 나 역시 J가 예전보다 한결 온화해졌다고 생각했다.
스코틀랜드와 한국이라는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일정을 공유하며 의견을 물을 때마다 학업과 일로 항상 바쁘던 J는 "다 괜찮아."라는 말만 남겼다.
나는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예약을 진행했고 선결제도 한국에서 모두 마쳤다.
여행 경비는 반반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고, 현지에서 선결제 금액의 절반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계획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전액을 미리 준비해 왔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첫날 받은 200달러 이후, 다음날 한 번에 정리될 거라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J는 매일 조금씩 돈을 찾아서 건넸다.
그날그날 사용한 금액을 정산하며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지만, 매번 은행을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반복되자 마음이 서서히 불편해졌다.
바닥난 공금을 다시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돈 이야기는 가족 사이에서도 조심스러운 주제니까.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긴 했지만,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부담스러웠다.
돌이켜보면, 꼭 마주했어야 할 진실을 나는 '배려'라는 이름의 그림자 뒤에 꼭꼭 숨겨두고 있었던 것 같다.
알아서 해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이성도 함께 무너졌다. 어쨌든 마음에 담아두는 대신 대화하며 직접 부딪혀야 한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차분한 목소리로 속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왜 꼭 네가 돈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해? 나도 돈을 갖고 직접 쓰고 싶단 말이야."
내 이야기를 듣던 J가 말했다.
"응? 그거야 현지에서 쓰는 경비는 그때그때 계산하기 힘드니까 공금을 걷어서 쓰기로..."
말을 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현타가 왔다. 그렇다. 함께 여행을 한다고 해서 꼭 돈을 모아 쓸 필요는 없다. 그때그때 각자 계산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매번 계산하는 방식이 번거로웠던 나는 공금을 모아 관리해 왔다. 주유비나 간식, 팁처럼 함께 써야 하는 돈도 있었고, 해외여행 특성상 여러 메뉴를 나눠 먹는 경우도 잦았다.
그 방식에 모두 동의했고 개인 경비는 각자 준비해 왔기에 큰 문제없이 여행해 왔었다.
한국에서 계획표와 함께 예약금과 현지 경비를 이미 공유했고, 지난번 스코틀랜드 여행에서도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차라리 J가 처음부터 한 번에 돈을 주고 각자 계산하자고 말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돈을 나눠서 받는 동안, 언제 받아야 할지 눈치를 보게 된 건 나였다. 그 과정에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이해뿐이었다. 이미 여행의 중반을 넘긴 시점이었고,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럼 이따 숙소에 가서 지금까지 쓴 비용만 정산하고, 이제부터는 각자 계산하자. 크루즈도 취소돼서 시간도 남았는데 그냥 들어가긴 아쉽잖아. 어떻게 할까?"
결론을 낸 우리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다음 여행지로 화제를 돌렸다. 가는 길에 '웨스트 팜 비치'에 잠시 들르기로 하고, 말없이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넓게 펼쳐진 초록의 잔디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묘하게 기분이 풀렸다.
J와 대화를 나눈 뒤, 우리는 더 이상 돈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여행에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툭 터놓고 물어봤더라면 오해가 쌓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행 일정만큼이나 개인의 감정 역시 조율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함께이기에 더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남아있던 생각들을 모두 털어냈다. 아무도 없는 이곳을 잠시 독점한 우리는 주유도 할 겸 가까운 쇼핑몰로 향했다.
생각 없이 들른 쇼핑몰은 아웃렛처럼 규모가 컸고, 사람이 없어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쇼핑몰 안을 걷다가 도시에서만 보던 메이시스 백화점을 발견했다. 건물 외관이 독특하고 예뻤다.
이대로 올랜도로 넘어가면 늦어질 것 같아,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역시 먹는 것만큼 확실한 위로는 없다.
모든 일에는 각자의 순리가 있다. 그리고 그 순리에 정답은 없다. 여행을 하며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방식 역시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닿을 수 없다.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해 열어 둔 말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