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 Lauderdale, FL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의 여유로움이 늘 부러웠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마인드는 대체로 느긋했고 긍정적이었다.
"Why not?!"
그들이 가볍게 건네던 만사 오케이의 주문은 사소한 걱정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 말 앞에서는 괜히 혼자 끌어안고 있던 마음의 짐도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현실에서는 서로의 다름을 끝내 넘지 못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이 아닌, 여행지에서 마주한 이들은 대체로 친절했고, 세상은 생각보다 조금 느슨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미국 바다라는 것
헤밍웨이가 왜 이곳에 반했는지 알 것 같았던 키웨스트에서의 하루가 지나고, 떠나야 하는 아침은 온통 회색 하늘이었다.
급작스레 쏟아진 폭우로 도로가 순식간에 잠길 만큼 아찔한 구간을 지나 우리는 무사히 '포트로더데일(Fort Lauderdale)'에 도착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새파란 하늘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호텔에 캐리어만 옮겨 두고, 이 하늘이 사라질까 싶어 바로 밖으로 나왔다.
항구 도시답게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여기저기 Fishing이라는 글자가 걸려있는 걸 보니 대부분 낚싯배인 듯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한다면 그것도 꽤 특별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신 햇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배들이 예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커다란 유람선 한 척이 항구로 들어왔다.
거대한 배 안에서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사람들이 춤을 추며 환호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일제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수줍게 손을 살며시 들어 올려 본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나눈 짧은 인사가 이 도시를 조금 더 가깝게 느끼게 했다.
키웨스트에서도 작은 요트 안에서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지만, 눈앞의 유람선은 그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규모가 컸다.
"아... 함께 하고 싶다. 재밌어 보이지 않아? 내일 시간 맞으면 이거 타 볼래?"
저들의 신명 난 분위기에 홀린 듯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저기 가서 물어보자."
J도 내심 이 유람선을 궁금해하는 듯 보였다.
커다란 배는 막 육지에 닿았고, 아직 흥이 가시지 않은 밝은 얼굴의 사람들이 하나둘 하선하기 시작했다.
근처 매표소에서 알아보니 할리우드 스타들의 별장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유람선 위에서 바비큐 파티도 열린다고 했다.
마침 내일 오전에 첫 배가 있었다.
유후~ 크루즈라니, 나도 드디어 타본다~~!!
잔뜩 신이 난 우리는 이번에는 길 건너 해변으로 향했다. 해를 등진 바다의 색감은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새파랗고 선명했다. 하얀 모래사장은 그보다 더 하얗게 빛났다.
그곳에서는 어린 친구들이 비치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거친 파도와 달리 그들의 움직임은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문득 내가 가질 수 없는 젊음이 그 안에서 반짝이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바닷가를 거닐었다.
여기가, 지상낙원
항상 마음속에 그려 두는 집이 있다.
미니멀한 선이 돋보이는 세련된 디자인의 단독주택.
넓은 앞마당에는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화로와 야외 식탁이 놓여 있고, 한쪽에는 언제든 몸을 던질 수 있는 프라이빗 풀장이 자리한다.
전면을 채운 통유리창 너머로는 채광이 깊게 스며드는 거실이 펼쳐지고, 그 한켠에는 공간의 온도를 책임질 벽난로가 포인트로 놓여 있다.
계단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면, 2층에는 생활과 휴식을 분리한 침실들이 자리해 있다. 게스트까지 고려한 여유로운 객실 구조는 머무는 이에게 불편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화이트 톤을 베이스로 한 실내에는 대리석의 매끈한 질감이 은은한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우드톤 가구들은 차가워질 수 있는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실내와 실외, 일상과 휴식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흐려지는 집.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번잡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온전히 쉬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마법 같은 집이다.
오후에는 다운타운인 라스올라스대로로 향했다.
'미국의 베니스'라는 애칭답게 가는 길마다 운하가 따라붙으며 도시의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좁은 골목 사이로 물에 잠긴 유럽풍 주택들이 낭만을 자아내는 베니스와는 달리, 이곳에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규모가 큰 저택들이 시원하게 흐르는 운하를 따라 늘어서 있다.
그 사이사이로는 럭셔리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요트들이 위풍당당하게 정박해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며 자신의 동네에 여행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조수석에는 커다란 대형견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그의 표정에서는 꾸미지 않은 만족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내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모습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그려 왔던 나의 이상에 가까웠다. 나의 꿈은 이미 누군가의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부러움이나 시기 대신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마을을 바라보게 되었다.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 눈에 담은 풍경만큼은 분명 나의 것이었다.
현실은 여전히 각박하지만 꿈을 꾸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한결 부자가 된다. 오늘의 이 장면은 언젠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조용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신비로운 마을을 벗어나 다운타운으로 들어선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지나오며 눈여겨보아 두었던 레스토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유럽의 중세 시대로 타임슬립한 듯한 공간에 잠시 말을 잃었다. 마침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라이브 재즈 공연이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려줬다.
긴 여행 동안 끼니를 때우기에 바빴던 우리는, 모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늘의 메뉴는 미국식 스테이크와 파스타!
음식의 맛을 더해 줄, 키웨스트에서 미처 마시지 못했던, 칵테일과 레모네이드를 함께 주문했다. 비록 운전을 해야 하는 나는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잔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책장을 펼쳐 놓은 듯한 접시에 잘 익은 스테이크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나왔다. J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주었다. 얇게 썬 고기는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지금껏 먹어본 스테이크 중 가장 맛있는 한 접시였다.
큰 기대 없이 찾았던 포트로더데일은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비록 거대한 단독주택을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잘 구운 스테이크 한 접시만으로도 그날 밤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