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West, FL
배가 고프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약 네 시간 반을 달려 키웨스트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긴 시간 운전을 번갈아 했지만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며 온 신경이 쏠려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더위는 더 거세졌고 그늘 하나 없는 메마른 도로 위를 힘없이 걷고 있었다.
"엇! 우리 저기 가서 밥 먹을까?"
"그래, 좋아!"
커다란 나뭇잎 간판 위에 '바나나 카페'라고 적혀 있었다. 바나나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 건물에 이끌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참치 샐러드를 주문했다.
후... 이제야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한숨 돌렸다. 무작정 들어온 식당에서 먹은 늦은 점심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게 차려진 음식이 집밥처럼 느껴졌다.
잠깐 숨을 고른 뒤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배가 부르자 거리의 풍경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원주택처럼 생긴 목조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신기한 점은 실제 주택이 아니라 식당이나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모 반듯한 우리의 상가 모습과 달라서인지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대체로 하얀색 외관은 파란 하늘과 맞닿아 청량감을 더해주었다.
길 끝에서 푸른 수평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고 아담한 해변에서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여유로운 모습이 평온해 보였지만, 높은 기온 탓인지 바닷물은 생각만큼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키웨스트의 상징인 '서던모스트 포인트(Southernmost Point)'를 찾았다. 사람들은 이 부표와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 있었다.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아 잠시 기다렸다가 후다닥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날이 좋으면 이곳에서 쿠바가 보인다고 하는데, 수평선 끝엔 제트스키를 줄지어 타는 사람들만 보였다.
그래도 '쿠바까지 90마일'이라고 적힌 글귀를 보니 정말 미국땅의 끝에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끝이라는 건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바다 건너 새롭게 펼쳐질 미지의 땅, 쿠바에는 또 어떤 매력이 숨어 있을지 궁금했다.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하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감정을 살짝 뒤로하고 여행의 후반부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달콤한 키라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일몰 맛집이라는 '멜로리 스퀘어(Mallory Square)'로 향했다. 상큼한 라임 향에 피로가 사르르 풀리며 다시 힘이 나는 것만 같았다.
여행은 반드시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늘이 심상치 않다.
인생 석양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는데, 서서히 몰려오는 먹구름이 불길했다. 애써 외면하며 간간이 비추는 햇빛을 붙잡아 본다.
'제발 사라지지 마...'
일자로 쭉 뻗은 길을 걷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거리엔 이곳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쳤고, 곳곳에 숨어 있는 상점은 화려한 수공예품들로 이목을 끌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식당들이 줄지어 있고 특색 있는 건물들이 눈길을 머물게 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늦은 오후, 거리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한껏 시끌벅적했다.
천장 가득 지폐가 붙어있는 술집,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손금을 봐주는 할아버지, 어디선가 바비큐를 하는지 맛있는 냄새와 함께 솔솔 피어오르는 연기까지 구경거리가 여기저기 넘쳐났다.
마치 방콕의 '카오산 로드'를 걷는 듯한 기분에 한껏 들뜬 순간, 나의 시선 끝에 'Sloppy Joe's Bar'라는 간판이 들어왔다.
찾았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술집.
잠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은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다.
칵테일 한 잔쯤 하고 싶었으나, 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온통 건장한 남자들뿐이었다. 그 틈을 파고들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석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우선 가던 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광장 초입에 들어서자 저 먼바다 끝에서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요트가 육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넘치는 흥겨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진정한 자유란 이런 걸까!
광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훌라후프로 예술 퍼포먼스를 하는 여자,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레모네이드를 파는 여자, 작은 테이블을 놓고 타로를 봐주는 여자... 마치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건, 한 남자가 쇠사슬에 묶인 채 정박해 있는 배 위에서 홀로 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워 조용히 자리를 떴다.
해 질 무렵의 광장은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다만 온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어줄 석양이 빠졌다는 것이 아쉬웠다.
차분해진 하늘 아래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집
(The Hemingway Home and Museum)'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던 대로변을 벗어나 작은 거리로 들어서니 마치 동네를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골목 사이에서 붉은 닭볏이 아름다운 수탉을 만났다. 이곳에서 유명한 닭이라고 하기에 살금살금 다가가 기념사진을 남겼다.
지나가던 길에 이곳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키라임 파이집에도 들렀다.
역시 외국 디저트는 내 입맛엔 많이 달았다.
내 드레스를 예쁘다며 칭찬해 준 주인아주머니가 보고 있어서 끝까지 다 먹고 조심스레 자리를 떠났다.
동네를 구경하다 드디어 헤밍웨이의 집에 도착했지만 안타깝게도 운영시간이 끝나있었다. 낮이 길어서 미처 시간을 체크하지 못한 탓에,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외관만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에 가려진 저택이 크고 아름다웠다.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미련을 남긴 채 처음 들렀던 '사우스비치'로 다시 걸어갔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고, 우리는 해변에 있는 바에서 오늘 밤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우연히 자메이카 스타일의 독특한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다.
희망과 긍정, 자유와 혁명, 자연과 평등을 상징하는 노랑, 빨강, 초록의 색감 속에서 레게의 전설, '밥 말리'를 발견하니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헤밍웨이 대신 마주한 밥 말리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밤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바다 향이 짙게 밀려온다.
어둠이 시작되니 제법 선선해져 걷는 것이 부담되지 않았다. 드디어 해변가의 바에 도착해 시원한 칵테일 한 잔을 기대하던 순간, 이미 그곳에서는 신랑, 신부와 하객들이 아름다운 밤을 즐기고 있었다.
가던 길을 허탈하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낮에도 멜로리 광장 근처 호텔에서 피로연을 보았는데 이곳에서도 마주칠 줄은 몰랐다. 이미 낭만적인 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꿈꿔 온 여행지에 와 있는데 정작 나는 헤밍웨이를 만나지도,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보지도, 분위기 좋은 바에서 밤바다를 즐기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생기는 게 여행이 아닐까.
스쿠터를 타고 이곳을 누비는 여행자들을 바라보며 대리 만족을 느꼈고, 손주와 커플티를 입고 다정히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는 묘한 따스함도 느꼈다.
내가 갈망하던 여행을 꿈꿨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하루를 보냈다. 그 속에서 찾아낸 소소한 기쁨들이 이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