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 수 없는 도시

뉴욕의 밤

by JULIE K

밤새도록 사이렌 소리가 앙칼지게 울려댄다.


날카롭게 퍼지는 경보음이 가깝게 들려올수록 가슴이 철렁 거린다. 반복적으로 들리는 사이렌소리는 시차로 잠 못 드는 것보다 더 집요하게 수면을 방해한다.


뉴욕에 온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한번 깬 잠은 다시 들기 어렵에 결국 나는 눈이 퀭하게 들어가고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앉은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밤산책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며 더 이상 박물관에서 비를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망설이다가 가까운 가게에서 우산을 샀다.


야심 차게 챙겨 온 우산은 숙소에 있고, 돈을 주고 우산을 사야 하는 게 조금 많이 아깝지만, 비에 쫄딱 젖은 생쥐꼴을 하고 나타날 수는 없으니 품위 유지를 위해 과감히 투자를 선택했다.


뉴욕에 살고 있는 J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또다시 길을 나섰다.

웨스트 14번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푸근한 인상에 편안한 옷차림의 남자가 지하철 역 밖에 서 있었다.


"이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아주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뉴욕거리 한복판에서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 본 사람과도 서슴없이 얘기하는 성격이라, 나 역시 주저 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초면이지만 어제 본 것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진 우리는 J의 친구 안내로 그리스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식당 내부는 다소 어두웠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진 촛불 덕분에 은은하고 락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식사는 훌륭했다. 리들의 대화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이들 이야기를 빼면 딱히 할 말이 없던 나의 근황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을 뜨겁게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 귀를 기울였다.


뉴욕에서 건축 쪽 일을 한다는 친구의 이야기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뉴욕 생활기는 들을수록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맞네... 나도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지...'


육아와 살림에 찌들어 살며 잊고 지내던 젊은 시절의 욕망이 시금 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랜 친구와 처음 만난 친구사이에서 잊고 지냈던 열정 가득한 나를 다시 만났다. 소중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어느덧 내리던 비가 그치, 도시를 뒤덮던 물방울들은 거리를 밝히는 빛을 담아 어둠 속에 내려앉아 반짝다.


빛을 따라, 친구를 따라 이번엔 근처에 있는 '하이라인 파크(The High Line)'로 걸음을 옮겼다. 버려진 화물철도를 개조해서 만든 공원은 놀랍게도 고가다리 위에 있었다.


빌딩 사이를 지나는 숲길이라니! 그것도 공중에서!!


드문드문 길을 비춰주는 조명덕에 우리는 오롯이 이 산책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식물들은 우리를 도심으로부터 잠시 차단시키기에 충분했다. 산책길은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밤새 우리를 괴롭히던 사이렌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 완전 내 스타일이야~~!!"


꿈꾸던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여기로 데려오길 잘했네. 이 공원은 옛날에 철길이었는데..."


공원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역시 건축 전공자답게 그의 시선은 한층 더 섬세했다.


화창한 봄날의 오후 문득 스쳐갔다. 에 오면 또 다른 매력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마음만은 청춘인 세 사람은 인적이 드문 거리의 낭만을 마음껏 누렸다.


공원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근처에 있는 첼시마켓을 찾았다. 느릿한 걸음 사이로 뉴욕의 밤은 한층 깊어졌다.


내 의지가 아닌, 누군가 손에 이끌린 여행은 선명하게 기억되지 않는다. 쩌면 그날의 장면보다 그때의 공기와 온기만이 내 안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결에 스친 웃음소리와 불빛의 흔적이 이제는 모두 아련한 추억으로 흐려졌다.



20th Floor


네모 반듯하고 정갈한 간격으로 줄 맞춰 서있는 빌딩 미로 사이를 헤쳐가며 빠르게 걷고 있다. 해가 지고 있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블록 하나가 이렇게 멀었었나? 아무리, 아무리 걸어도 이 블록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어? 여기 아니야?"


"그러네? 근데 여기 올라가도 되겠지?"


리모델링이 한창인 건물 앞에는 철근 구조물이 도보 주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우리가 가려는 라운지의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230 FIFTH


"맞게 찾아온 거 같은데? 일단 들어가 보자!"


도시는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고 자칫하다가는 석양을 볼 수 없겠단 생각에 주저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로 올라갔다.


와아~~~~~~~~!!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단순히 건물 옥상일 거라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은근한 조명아래 익숙한 라운지 바를 지나 루프탑으로 향하는 좁은 문을 열고 나간 곳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세상' 마주했다.


마치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옷장을 통해서 나니아 숲으로 들어간 기분이랄까?


비좁은 옷장뒤에 거대한 왕국이 숨어 있는 것처럼, 루프탑에선 끝없이 펼쳐진 전망과 함께 예상 밖의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바로 앞에 우뚝 솟은 거대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을 중심으로 한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서쪽 끝에 잠시 걸쳐 있던 태양은 다행히도 우리를 기다려줬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뉴욕의 밤을 온전히 즐겨도 된다고 강렬한 빛의 여운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갔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입구 쪽에 자리가 비어 있어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잠시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웨이터가 다가와 뷰가 더 잘 보이는 자리로 안내했다.


한층 안락한 자리로 옮기자 비로소 이 모든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씩 분위기에 녹아들며 우리는 '라즈베리 모히또' 두 잔을 주문했다.


이곳 사람들은 비밀의 공간에서 지인들과 오늘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들, 직장 동료인지 친구인지 모를 이들과 술을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와인을 즐기는 여자 셋,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신나는 비트의 음악은 우리의 마음까지 춤추게 한다.


낯선 문화 속에서 조금은 어색했던 우리였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색다른 즐거움을 찾았다.


일상, 행복, 축하, 고민, 위로...


평범한 일상의 끝은 여러 마음과 생각이 모여 따뜻하게 저물어 간다. 어느덧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하나 둘 불이 켜지며 차갑게 식어가던 도시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시간이다.


화려한 불빛의 유혹에 천천히, 그러나 깊이 빠져든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아쉬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어쩌면 뉴욕의 밤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잠들 수 없는 것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거리를 두 여자가 활보하고 있다.


모히또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늦은 밤 지하철을 타는 대신 이 거리를 즐기며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한층 커진 목소리는 평온한 빌딩 사이를 돌며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수다 삼매경에 빠진 두 여자는 걸음마저 즐거워 나풀거렸다. 하루 종일 걸어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총기사고가 많은 나라, 출발 전에도 도심에서 사고 소식이 들려와 잔뜩 경계했었지만 어느새 이 도시의 매력에 빠져버린 두 여자는 치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길을 걷다 보니 마음까지 뻥 뚫리는 듯했다. 블록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길고 끝이 없었다. 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 아쉬운 마음에 쉽게 잠들 수 없는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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