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을 넘어 뉴욕을 걷다.

Central Park

by JULIE K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영어를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1990~2000년대 영어공부를 조금이라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을 기억할 것이다.

Rachel Green / Monica Geller
Phoebe Buffay / Joey Tribbiani
Chandler Bing / Ross Geller


사랑과 우정 그리고 성공을 향한 여섯 친구들의 인생 이야기. 약 10년 동안 이어진 시즌 10을 끝으로 막을 내린, 미국 TV시리즈 역사상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시트콤 드라마 '렌즈(Friends)'의 주인공들이다.


그때 내가 영어를 공부하던 방법은 이랬다.


처음엔 한글 자막으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고, 다음엔 영어 자막으로 문장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익히고, 마지막엔 자막 없이 드라마를 온전히 감상하며 대화 내용을 들으면 한 번의 과정이 완성된다.


나에게 '프렌즈'는 영어 선생님이자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성장하며 울고 웃었던 시간은 내 청춘의 일부이자 인생 그 자체였다.


이야기의 배경인 맨해튼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 그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카페 '센트럴 퍼크'의 소파에 둘러앉아 한결같은 농담을 주고받던 여섯 친구들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그들의 인생을 함께 이어고 있을 것만 같다.


이 도시는 그들로 인해 더욱 특별해졌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뉴욕 중심부에는 거대한 녹색 심장이 있다. 도시의 활기찬 리듬 속에서 자연의 경이로움과 평온한 휴식을 선사하는 특별한 공간, 바로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다.


대도시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그 초록이 살아 숨 쉬는 공원에서 시작할 생각이다. 본격적인 산책에 앞서 길 건너 레스토랑에서 잠시 에너지를 보충하기로 했다.


근처에는 우리의 '케빈(나 홀로 집에 2)'이 나 홀로 자유를 만끽했던 '플라자 호텔(The Plaza)'도 있었다. TV에서 봤던 익숙한 건물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찾은 곳은 '사라베스(Sarabeth's Central Park South)'이다.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Sex and the city'의 주인공들이 즐겨 찾던 브런치카페로 유명하다기에 뉴욕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조금 우아하게 해 보자며 일정에 넣은 곳이다.


예약 없이 갔데 다행히 자리를 안내받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민 없이 주문한 메뉴는 바로 이 식당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에그 베네딕트''프렌치토스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음식을 기다려본다.


잠시 뒤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은 플레이팅의 음식이 나왔다. 접시 위에 담긴 노른자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버터향과 시럽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지며 식욕을 자극했다. 포크를 들기도 전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배가 몹시 고팠던 우린 천천히 조금씩 음식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빵을 가르니 용암처럼 수란이 흘러내렸다. 먹기 좋게 자른 빵 한 조각에 촉촉한 계란을 올려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부드러움과 달콤함 그리고 고소한 풍미까지 한데 어우러져, 그 순간만큼은 나도 '사라 제시카 파커'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커피잔이 비워질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채워지는 시커먼 커피. 괜찮다는 말을 못 해 세 번이나 리필받은 우리. 세금이 잔뜩 붙은 계산서를 받아 들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우리.


역시나 우리에게 고급 레스토랑은 사치였다.


호화로운 분위기와 비싼 음식은 사라지고 허탈한 웃음으로 현실을 되찾은 우린 다시 공원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Central Park
in New York


출렁이는 작은 연못 속, 고층빌딩이 반사된 물 위를 사이좋게 헤엄치는 청둥오리들. 공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풍기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마음이 사로 잡혔다.


사방을 초록 숲이 감싸고, 시선을 위로 올리면 개성 치는 도심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거다!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순간, 내가 찾던 도심 속 오아시스!


센트럴 파크는 첫인상부터 내 마음을 훔쳐갔다.


아, 맞다! 케빈! 여기에도 왔었지. 케빈이 힘들 때 지혜와 용기를 준 비둘기아줌마 와의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푸릇한 잔디 사이 산책로를 걷다 보니 주변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바위가 나타났다. 인위적으로 보이는 바위를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 같진 않았다. 곳곳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크고 작은 암석들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드넓은 대지를 자랑하는 공원은 원래 바위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다고 한다. 그 많던 바위를 거둬낸 뒤 일부만 남겨놓고, 빙하가 남긴 흔적을 간직한 이 바위들은 지질학적으로 꽤 중요한 역사를 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나는,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며 생뚱맞게 놓인 돌덩이 정도로만 보고 말았다.


눈앞에서 역사를 놓친 나는 해맑게 웃으며 바위산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부지런히 사진으로 남겼다.


그저 케빈과 비둘기아줌마와의 우정만을 추억하면서...


"아들은 많이 컸겠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엄청 컸지~!! 며칠 전엔 말이야..."


신나게 모험을 즐기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J가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외국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겠지?"


우연히 보게 된 TV프로그램에서 외국 아이들의 수업 장면이 떠올랐다. 수학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교실이 아닌 체육관에 있었다.


수학공식을 체육활동과 접목해 몸으로 익히는 수업이었다. 행복한 표정의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며 자연스레 수학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수업 방식은 신선한 충격이자, 한편으론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나의 얘기를 들은 J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교육과정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어린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두 여자의 수다는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열심히 떠들며 걷다 보니 유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케이드, '베데스다 테라스(Bethesda Terrace)'까지 닿아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곳에는 아기천사 동상이 서 있는 분수가 있었다. 뒤편의 호수와 어우러지며 한층 더 낭만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저마다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리에서 공연하는 사람, 아이와 즐거운 추억을 쌓는 가족, 잔디에 누워 책을 읽는 이들까지... 모두의 시간은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보낸 우리의 소중한 시간도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전 05화잠들 수 없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