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륙을 기다리며
우뚝 솟은 빌딩들 사이를 헤치며 걷는다. 손에 꽉 움켜 쥔 캐리어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숨이 차오르도록 걷는다.
"다 왔어. 여기지?"
"맞는 거 같은데? 다행이다. 늦지 않게 와서."
두 여자는 빌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골목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15분 간격으로 온다는 공항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왜 안 오지? 늦으면 안 되는데..."
애타게 기다리던 공항버스는 3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휴~! 버스가 도착했단 사실에 안도한 우리는 캐리어를 싣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마지막일지도 모를 도시의 경관을 말없이 바라봤다. 잔뜩 힘주어 두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참을 수 없는 눈꺼풀의 무게에 결국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안녕, 뉴욕.
안녕, 마이애미!
버스가 멈추자 잠에서 깬 우리는 급히 짐을 챙겨서 내렸다. 시간이 촉박해진 탓에 곧바로 뛰기 시작했다.
2층? 3층? 출국장이 몇 층이지?
정신없이 뛰어 들어간 공항 안에서 급히 체크인 카운터부터 찾았다.
"25달러씩 총 50달러입니다."
"네? 얼마라고요?"
짐을 부치는데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무게가 오버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유럽에서 저가항공을 그렇게 타고 다녔어도 짐을 부치는데 돈을 낸 적은 없었기에 승무원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라면 내야지. 울며 겨자 먹기로 피 같은 지폐 100달러를 내밀었다.
"잔돈은 없어요."
하! 돈을 내라고 하면서 잔돈이 없다니, 어이가 없었다. 카드만 받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순순히 카드를 내밀 내가 아니다. 이미 현지에서 쓸 만큼의 돈을 환전해 왔기 때문에 굳이 환전수수료를 내면서까지 카드를 쓸 이유는 없었다.
잔돈이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면 그만이다. 가까운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눈에 띄는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었다.
$0.45
다시 승무원에게 달려가서 비용을 지불했다. 그 바람에 시간이 더 촉박해져서 슬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국내선이니까 여유가 있지 않을까 하며 안일하게 생각하던 지난 시간의 나를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출국장을 넘어가는 과정은 웬만한 국제선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인내를 가지고 겨우 게이트를 찾아온 우린 다행히 바로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비행기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점점 길어지는 대기시간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은 마이애미로 이동하는 날이기에 일정이 없어 늦어져도 상관은 없지만, 렌터카도 빌려야 하고 숙소까지 운전을 해서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남아있다.
아침부터 공원을 걸으며 쌓인 피로에 또다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잠깐 졸다가 깨서 무심결에 창밖을 봤는데 여전히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아직도 지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 비행기 옆으로 다른 비행기들이 쭉 열 맞춰 줄을 서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광경인 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치 좁은 차선에 차량이 한 대씩 끼어드는 것처럼, 비행기가 진입 순서대로 한 대씩 천천히 이륙대형을 맞추고 있었다.
수많은 비행을 경험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활주로 위에도 교통체증이 생기다니 세상에...'
신기한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이제 정말 떠난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뉴욕과의 이별, 그리고 새로운 여정의 시작.
안녕, 뉴욕, 그리고 안녕, 마이애미.
Little India
약 3시간의 비행 끝에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국제공항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고, 렌터카 숍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목적지를 찾은 우리는 바로 예약을 확인했다.
"자동차 보험은 두 가지가 있어요. 어떤 걸로 가입하시겠어요?"
맞다, 보험! 깜박 잊고 있었다. 후...
여자 둘의 여행이니 조금 더 비용을 내더라도 보장이 확실한 상품으로 선택했다.
드디어 차키를 건네받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한 단계를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온 기분은 한결 가볍다.
그곳에는 예전에 미국서부 여행 때 탔던 것과 똑같은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색깔까지 같을 줄이야! 반가운 마음에 설렘지수가 한껏 올라갔다.
익숙한 손길로 차량 외관을 사진 찍기 시작했다. 만일을 대비한 나름의 작은 보험이었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진정한 자유여행의 서막이 열렸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액셀을 꾹 밟았다.
"인생 뭐 있어? 가는 거야~~!!"
신나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심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휴양지답게 여유로운 풍경이 차창 밖으로 흘러간다. 빼곡히 들어선 고층빌딩 대신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야자수가 손을 흔드는 듯하다.
흥이 오른 두 여자의 수다에 라디오 음악이 더해지며 차 안은 시끌벅적했다.
다행히 길을 헤매지 않고 숙소에 도착했다.
인도분들이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인세스 향이 부드럽게 감쌌다.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의 집에 놀러 온 듯, 낯설지만 이상하게 편안한 공간이었다.
"어, 저거 우리 차 아니야?"
체크인을 하던 중 J가 밖을 가리켰다.
"어디? 왜?"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타고 온 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신기해서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호텔도 아니고 유스 호스텔에서 발레라니! 아저씨는 해맑게 웃으며 차를 안전한 곳에 주차해 두었다고 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눈앞에서 발레비가 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늦은 시간,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 식당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사람 사는 곳 다 거기서 거기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거리엔 불이 켜진 곳이 드물었다.
그러다 골목을 돌아선 순간, 어디서 많이 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고른 재료로 즉석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주는 서브웨이. 저렴하고 맛있어서 젊은 시절 자주 가던 곳이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간 곳엔 검은 후드티를 입은 청소년 열댓 명이 자유분방하게 모여 있었다.
나이로는 우리가 훨씬 위였지만, 덩치로 보나 쪽수로 보나 완전히 밀렸다. 순간 살짝 겁이 났다. 하지만 주변에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 안에 직원도 있는데, 별일이야 생기겠어? 그냥 들어가자"
"꼭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일이 생기던데..."
서로 불안했지만 용기 내어 청년무리 사이를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자와 샌드위치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아...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배정받은 침대의 상태가 한눈에 봐도 영 좋지 않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챙겨 온 침낭라이너를 꺼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기에 꾹 참고 라이너를 펼쳐 깔았다.
결국 불편함을 편안함으로 바꾸는 것은 내 몫이다.
낯선 공간에서도 내 자리를 만들어간다는 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얇디얇은 침낭라이너 안은 생각보다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