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카야, 지중해의 꿈을 품다.
고요하고 잠잠했던 긴 밤이 지나가고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소리 없이 다녀간 비로 촉촉해진 바닥과는 달리, 하늘엔 오늘 하루 화창할 거라며 새하얀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젯밤 아저씨가 차를 세워 둔 곳은 임시 주차장이었다. 8시 전에 빼야 한다니, 산책도 할 겸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옮긴다.
'응? 여긴 강일까, 호수일까?'
포실포실 떠있는 구름을 고스란히 담은 강물과 그를 둘러싼 마을의 풍경은 마치 작은 정글을 연상케 했다. 하늘과 맞닿아 환상적인 대칭을 이루는 그 장관에 흠뻑 취해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잠시 산책을 즐긴 뒤, 차를 옮겨 놓고 J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아치형의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작고 아늑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외에서 조식을 먹는다고?"
"우와~ 이런 곳이 있었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한 두 여자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감탄을 쏟아냈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가 졸졸 흐르고 있었고, 주변엔 개성이 넘치는 의자와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한쪽 테이블에는 빵과 과일, 주스가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으며, 작은 공간 안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한층 더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비밀의 정원'에서 젊은 여행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J와 나도 음식을 소담하게 담아와 우리만의 조식 시간을 즐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속에서 꽉 채운 여행을 했다면, 지금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여행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저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미지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밀려왔다.
참으로 묘한 아침이었다.
시간을 간직한
Vizcaya Museum and Gardens
저 멀리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의 손에는 카메라와 반사판 등 촬영 장비가 들려 있다.
무엇을 촬영하는 걸까?
한편 다른 공간에서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포즈를 취하며 촬영에 임하고 있다. 아무도 오르지 않을 것 같은 외딴 계단에서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머리 손질을 받으며 촬영을 준비 중이다.
메인 정원에서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사람들을 이끌며 빠르게 이동한다.
이곳은 정말 화보 촬영의 성지라도 되는 걸까?
계속해서 나타나는 인형처럼 예쁜 모델들에 정신이 아찔하다. 나도 화려한 드레스 하나쯤 입고 왔어야 했나 싶다.
신기한 광경에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이드북이 3달러인데 구매하시겠어요?"
"네? 3달러요?"
정원 하나 보러 왔는데 가이드북까지 사야 한단 말인가. 고작 3달러가 아까워서 괜찮다며 쿨하게 거절하고 입장 권만 받아 들었다.
마이애미에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비즈카야 정원(Vizcaya Museum and Gardens)'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는 유럽풍의 조각상들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주황색 대저택의 지붕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규모가 상당할 것 같았다.
푸르른 나무 사이를 따라 걷다 보니 눈부신 햇살아래 에메랄드 빛 수영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창한 하늘빛이 물결 위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반짝였다.
별장 바로 앞에는 탁 트인 바다가 이어지고, 그곳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배 한 척이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와...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부만 봤을 뿐인데도 압도적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바닷가 쪽으로 발을 내밀고 길 끝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나무 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한결 시원했다.
잠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은 뒤, 이번엔 별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을 열자, 청량함이 가득한 실내 풍경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새하얀 벽면과 높은 층고는 시야를 한껏 넓혀 주었고, 시원하게 뻗은 야자나무는 마치 작은 식물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투명한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반짝이는 파편처럼 실내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친척집에 놀러 온 것처럼 우리는 1층부터 3층까지 구석구석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느 층에 올라서든 방금 지나온 중정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각 방에는 예전에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복도로 나오면 전형적인 남부지방 별장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방 안은 금고처럼 귀중품들로 가득 차있는 휘황찬란한 내부 모습이 마치 유럽의 궁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밖에서 바라보던 단정하고 전형적인 별장의 모습과 달리, 안은 화려하고 풍성해 그 대비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대체 여기에 살던 사람은 얼마나 큰 부자였을까?
어쩐지 [소공녀]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딸에게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그 사람처럼, 이 별장의 주인도 화려함 속에 따뜻한 마음 하나쯤은 숨겨두지 않았을까.
고작 3달러를 아끼려다 가이드북을 사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웠다.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오로지 눈으로만 이 진귀한 풍경들을 담아야 했다.
최근 올라온 글을 보면 내부 촬영이 가능한 듯해, 지금은 사진 촬영도 허용되는 것 같다.
어느새 태양이 성큼 올라와 제법 뜨거워진 햇살을 가르며 이번엔 정원을 걷고 있다.
프랜시스 버넷의 3대 작품인 [소공녀]에 이어 이번에는 [비밀의 화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메리가 정성껏 가꾼 정원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잘 가꾸어진 덤불들이 기하학적인 무늬로 수 놓여 있고, 한쪽에는 이 시대의 것이 아닌 둥근기둥모양의 테라스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걷다 보면 작은 분수가 나타나 더위를 식혀준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정원은 볼거리가 무궁무진했다.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우리는 시원한 나무 그늘길을 두고 굳이 한낮의 눈부신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고 또 걸었다.
보물 찾기를 하듯,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 온 고풍스러운 계단과 건축물을 찾아다녔다.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운 비밀 장소들이 정말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곳을 지나쳐 온 사람들은 모두 같은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보낸 단 하루의 빛을, 그들은 또 어떤 마음으로 기억했을까.
나의 시간 속 비즈카야는 오래도록 기억될 완벽한 여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