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그림자, 리틀 하바나

Little Havana, Miami, FL

by JULIE K

작열하는 태양을 피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공기만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다행히 습기가 많지 않아 그늘만 찾는다면 더위는 금세 사그라들 것이다.


길을 걷다 우연히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둘러앉아 '도미노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꾹 눌러쓴 모자 사이로 희끗희끗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위로부터 탈출하려는 듯 보였지만, 정작 그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게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 타일을 고르는 그들의 중한 손길은 중국에서 마작을 두는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그들의 얼굴엔 근심걱정이 없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일 부딪히는 소리가 정겹다.



끝내 타오르지 못한
쿠바의 열정


바다를 건너지 않고도 만날 수 있는 정열의 쿠바, '리틀 하바나(Little Havana)'에 왔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셔츠에 부츠를 신은 남자의 손에 들린 시가, 쿠바를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그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 곧장 '시가 팩토리(Cigar Factory)'로 달려갔다.


사진에서 보았던 인디언 나무 조각상이 입구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리창 너머에는 시가를 입에 문 남자 형상의 조형물이 의자에 걸터앉아 밖을 응시하고 있다.


고급스러운 상자에 정성스레 담긴 두툼한 시가들은 정갈하게 진열돼 있었,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알싸한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예전에 영국에서 지냈을 때, 외국인 친구들이 담뱃잎을 종이에 넣고 정성스레 돌돌 말아 피우던 담배가 떠올랐다. 손수 말아야 하는 그 번거로움의 매력이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유행처럼 번져나간 적이 있었다.


몸에 좋지도 않은 것을 왜 굳이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들고 다니던 담배 케이스만은 유난히 예뻐서 눈길이 가곤 했다.


눈앞에서 장인이 직접 시가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오래전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인기가 많은 곳이라 여행자가 붐빌 것이라 예상했지만, 매장 안에는 우리 둘 뿐이라 어색한 공기만 감돌았다.


여행프로그램에서나 보았을 법한 장면들을 대충 눈도장 찍은 우리는 금세 흥미가 식어 다시 눈부신 거리로 나왔다.


얼마 걷지 않아 눈에 띄는 수공예품 가게로 들어갔다. 손수 만든 목각 인형과 전통 악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고, 벽에 걸린 화려한 그림들이 자연스레 시선을 끌었다.


선명한 색채가 한눈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우리 둘 뿐이었다.


조용하다.


분명 관광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정작 관광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명하다는 가게마다 사람은 없고 거리는 고요했으며, 이따금 한두 명의 현지인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필 우리가 방문했던 시간대가 시에스타처럼 한낮의 적막에 갇힌 걸까. 도로 위에는 열기에 휩싸인 아지랑이만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때 어디선가 잔잔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남자 두 명이 악기를 연주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마치 이 날의 기분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리'가 떠오르는 길바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명인사의 이름이 별 속에 각인돼 있었다.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재치 넘치는 영화캐릭터 분장을 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오직 별들만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쿠바 느낌의 건물들과 벽에 그려진 화려한 그라피티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흥이 넘치는 라틴 문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의 리틀 하바나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만이 도시를 뜨겁게 불태우고 있었다.



여기가 미국 바다잖아!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힙합 비트가 심장을 쿵쿵 두드린다. 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힙한 젊은이들이 거리를 지나간다.


마이애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우스 비치에 도착 지금, 빨리 내려 이 음악에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현실은 주차자리를 찾지 못해 같은 거리를 몇 번이고 빙빙 도는 중이다.


역시 자동차는 편리하지만 때론 커다란 짐덩어리일 때가 있다. 서울 한 복판에는 웬만하면 차를 가져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도 자리가 없어. 근처에 공영주차장 표시도 안 보이네."


"후...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이렇게 포기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아보기로 했다. 천천히 차를 움직이며 좌우를 살피던 그때,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재빠르게 액셀을 밟았다. 힘겹게 주차를 마치고 바닷가로 향했다.


차 안에서만 벌써 세 번째 마주했던 풍경을 이제는 걸으며 직접 바라보니 이 젊음의 거리가 한층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금요일 저녁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리틀 하바나와는 또 다른 활기로 눈과 귀가 즐거웠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찰나, 도시는 어느새 차분히 식어가고 있었다. 동쪽 해변이라 석양이 려하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하루의 끝 보내는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제법 시원해진 바람 따라 해변으로 걸었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도소리가 깊게 울려왔다. 날이 좋아 해변에도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도 모래 위에 수건을 깔고 잠시 앉았다. 밀려오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LA를 배경으로, 한때 해상 구조대 이야기로 유명했던 미국 드라마[베이워치]가 떠올랐다. 응급상황만 생기면 모래사장을 전력질주하던 구조대원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스친다.


이렇게 넓은 땅을 둘러싼 바다는 LA나 마이애미나 비슷하지 않을까? 여긴 미국이니까!


나 홀로 떠올린 엉뚱한 상상을 뒤로하고 한동안 우리는 해변에 앉아 미국바다를 마음껏 감상했다.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바다지만 희한하게도 파도가 출렁이는 모습에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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