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너의 시간들

by JULIE K

문득 전에 봤던 유튜브 내용이 떠올랐다.


학원 레테(레벨테스트)를 위해 또 다른 학원을 보낸다는 야기였다.


'대치동 초등 국영수 로드맵'이 재한다는 사실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학원마다 기준 연령도, 요구하는 수준도 달라서 원한다고 해서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이가 그 흐름만 잘 따라와 준다면, 래프 그려진 코스를 밟아 서울대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완벽하고, 무엇보다 든든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아 묘하게 상대적 박탈이 밀려왔다.


나는 저렇게까지 해 줄 수 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인터넷나 맘카페에 올라오는 글과 영상들을 보다 보면 마치 그 길이 정답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방식으로 주관을 가지고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만 택해 지원하는 부모들도 많다.


방법은 모두 다르지만 저마다 원하는 목표를 향해 충분히 열정적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목표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부모가 바라는 자식의 미래일 수도 있고, 자식이 꿈꾸는 미래일 수도 있다.


두 방향이 같다면 다행이겠지만 어쩌면 그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일이, 이 모든 과정 중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3년의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아들은 운이 좋게 국제중학교에 입학해 그 시간을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다.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집에서 홀로 공부하던 녀석이, 학교에서 제공하는 수업과 방과 후 프로그램만을 따라가며 고군분투했을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켠이 무겁다.


방학 특강이라도 근처 학원에서 신청해 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형편에 분기별 등록금만으로도 빠듯했기에, 그 생각은 매번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등굣길만큼은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매일 아침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큰 투정 없이 3년을 무사히 버텨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러다 문득 녀석의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은 수업만 성실히 따라가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고, 수행평가 역시 조금만 노력하면 과가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지금의 성적이 과연 실력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는 걸까.


고등학교 진학 전, 재 수준을 한 번쯤 점검해 두면 부족한 부분을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영역에서 녀석의 진짜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인하고 싶어 져 인터넷에 중학생이 볼 수 있는 영어시험을 검색해 보았다.


TOEFL Junior


오호~! 이게 좋겠다.


곧바로 아들에게 바로 카톡을 보냈, 영문을 모르는 녀석에게 시험을 보려는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 치르는 자격시험이었지만 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나는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여러 과목의 시험에 응시하게 해 왔다. 자기주도 학습을 해 온 아이의 학습 역량을 확인하는 데는 시험만큼 분명한 기준이 없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험을 보기 전에는 항상 유형정도는 익히고 가게 했다. 접수를 마치면 문제집 한 권을 풀고 시험장에 가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었다.


물론 문제집을 끝까지 다 풀지 못한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의 결과는 늘, 운이 좋게도 노력 이상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 아들에게 문제집을 사주었다. 시까지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유형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아, 뭐야? 왜 이렇게 쉬워? 그냥 토플 시험으로 보면 안 돼?"


문제집을 들여다보던 아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요 녀석 봐라? 시험을 너무 만만하게 보네.'


투덜대는 아들에게 바로 토플 교재의 한 지문을 보여줬다.


"그냥 토플 주니어로 볼게요."


지문을 읽던 녀석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엄마가 시험을 보자고 한 건, 그동안 네가 혼자 공부해 온 게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고 싶어서야. 그러려면 네 수준에 맞는 시험을 봐야지. 토플은 성인들도 보는 시험이잖아. 아직은 어휘가 거기까지는 아니고."


"알았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녀석은 시험 전날까지도 문제집을 거의 풀지 않았다.


정말 자신만만해서라기보다는 공부가 제법 귀찮아진 모양이었다. 마지막 중간고사가 끝난 데다 학교 행사들이 이어지면서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시험 날이 밝았다. 아들은 처음으로 고사장을 혼자 찾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카톡이 왔다.


엄마



진짜 겁나 어린애들만 들어가는데요.


괜찮아. 들어가.


못 들어가겠어요.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고사장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모두 초등학생이라며 아들은 시험 보기를 거부했다. 뜻밖의 복병이었다. 녀석은 정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버티고 섰다.


톡으로는 도저히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접수할 때 함께 시험을 보는 아이들까지 알 수는 없으니, 나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인터넷에서는 중학생이 보는 시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초등학생이 보면 안 되는 시험도 아니지 않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이번 회차에는 학원에서 단체로 신청한 거 같다고, 그냥 들어가서 시험만 보고 나오면 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설득했다.


전화를 끊고 입실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다시 카톡이 왔다.


최대한 어린 티 내야겠다. 저는 이제부터 키가 엄청나게 큰 중1입니다. 요즘 애들은 키가 다 커서 가능할 듯요.


ㅋㅋㅋㅋㅋㅋ 그래, 좋게 생각하자. 아무도 너 신경 안 써. 시험에만 집중!


시험이 끝날 시간에 맞춰 남편과 딸과 함께 출동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녀석은 차에 타자마자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조금만 공부했잖아? 그럼 정말 잘 봤을 거 같아."


"문제가 쉬웠어?"


"어. 지문이 술술 읽히던데. 몇 개 헷갈린 것 빼고는 할 만했어."


"그러니까 미리 문제집 좀 풀어보라니까."


아들은 정문 앞에서 한참을 서서 안으로 들어가는 꼬마친구들을 바라보던 이야기부터, 고사장에 들어가 시험을 보기까지의 과정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배가 고플 녀석을 위해 처 커피숍에 들러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러다 누군가 초성을 던졌고, 우리는 한동안 뜬금없는 초성 게임에 빠져들었다.


딸아이의 숨겨진 어휘 실력에 감탄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가족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험 결과가 나왔다.


아들의 말대로 아깝게 놓친 몇 문제를 제외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점수였다. 렉사일(Lexile) 지수도 예상보다 높게 나와서 학교를 그냥 다닌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의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그 또한 지금 이 아이의 실력이었다.


그런 아들에게 지금까지 스스로 잘해왔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고 그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녀석의 영어실력 점검은 이걸로 충분하다.


이제부터 아들이 보게 될 시험들은, 아마도 조금 더 분명한 목표를 향한 시험이 될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노력의 크기도 점점 달라지겠지만, 대가만큼은 언제나 정직하다는 걸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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