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졸업
변화는 당연한 것이고 시간은 반드시 흘러간다.
내가 즐겨 듣는 라디오 DJ는 매일 한 번도 빠짐없이 주문을 외우듯 이렇게 말한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녹록지 않아 사회생활.
어쩔 거냐 사춘기.
지나간다 갱년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생각 없이 웃어넘겼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아들의 중학교 생활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으면서, 그 말의 진가와 시간의 무게를 비로소 체감하게 되었다.
집안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재촉한다. 뭔가에 떠밀리듯 정신없이 준비하고 나면 벌써 출발 시간에 가까워지니 말이다.
아들의 졸업식이 있는 날의 아침도 그랬다.
남편이 마지막 등굣길을 배웅하기로 해서 느긋하게 모닝 요가를 즐길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아침밥만 먹었을 뿐인데도 외출 준비를 하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아, 어떡하지? 이 코트를 입고 싶은데 너무 얇은 것 같고, 롱코트를 입자니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그냥 아무거나 입어."
출발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외투를 고르지 못하자 남편은 슬슬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엄마, 봄이야? 아니 무슨 옷이 욕실 가운처럼 생겼어. 하얀색이면 완전 호텔 가운이야."
그 와중에 눈치 없는 딸아이는 한마디 거들며 웃어댄다.
"아, 모르겠다. 안에 얇은 옷을 여러 벌 껴입었으니 춥지는 않겠지."
결국 딸아이가 욕실 가운 같다고 놀려댄 봄코트를 입고 허둥지둥 길을 나섰다. 다행히 졸업식이 시작하기 30분 전에 도착했다.
강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몇몇 아이들이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걸 보고 바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니? 잠깐 뒤로 나와봐. 우리도 나가서 사진 찍자."
"아, 안돼. 나 지금 애들이랑 게임 중이란 말이야."
"뭐, 뭐라고? 게임?"
한숨이 나왔지만 시간이 없었다. 45분까지 졸업생들은 모두 착석해야 했고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나온 녀석을 데리고 운동장에 설치된 포토존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뛰며 졸업 가운을 입고 한 손에 학사모를 든 아들의 모습을 보는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집에서 매일 보던 아이인데 격식을 차린 옷을 입고 있으니 괜히 멀게 느껴졌다.
우리는 포토존에서 돌아가며 서둘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직은 사람들이 없어 우리끼리 편하게 이 순간을 기념할 수 있었다.
졸업식은 식순대로 진행됐다.
처음 1부에서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다. 초대장에 적힌 행사명만 계속 확인하며 빨리 끝나기만을 고대했다.
2부가 시작되고 시상식이 이어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학부모 대표까지 축사를 낭독하는데, 입학한 순간부터 지나온 시간들이 떠오르며 괜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졸업장 수여식이 진행됐다. 1반부터 차례로 단상에 올라 선생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보라색 가운이 만들어내는 물결이 아름답게 일었다.
아이들과 선생님은 악수를 나누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더 큰 감동이 밀려오며 뿌듯한 마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감성을 와장창 깨뜨리는 딸아이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엄마, 저 가운 입고 있으니까 해리포터 마을에 온 것 같아."
"뭐어?"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스크린에 뜨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녀석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기 오빠들 다 똑같이 생겼어."
코로나 탓에 유치원 졸업식을 경험하지 못한 꼬마는 난생처음 보는 졸업식 풍경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졸업식을 겪어 온 나 역시 이렇게 정성을 다한 졸업식은 처음이었다. 별것 아닐 거라 여겼던 마음과 달리, 어느새 누구보다 감정이입하여 함께 졸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015B의 '이젠 안녕'이 흘러나오고,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담은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지나갈 때마다 학부모로서 함께 행사에 참여하고 활동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뭉클해졌다.
이어 선생님들의 깜짝 영상이 나오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진심을 담아 전하는 메시지에 감동이 더해지며 괜히 울컥했다.
"마지막으로 등교하는 기분이 어때?"
아들의 마지막 등굣길에 물었다. 녀석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실감이 안 나. 그냥 다사다난했다? 놀기엔 좋았어."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놀았어?"
"학교 자체에서 노는 프로그램이 많았어."
어제 아침, 녀석을 마지막으로 학교에 데려다주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을 담임 선생님들의 아쉬운 마음이 영상 속에서 전해지자, 녀석의 말이 무엇을 뜻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교과목 선생님들과 교직원들이 차례로 등장할 때마다 점점 커져가는 아이들의 탄성이 그 의미를 더해주었다. 아이들 역시 열과 성을 다해,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졸업생들의 앞날을 응원하고 축복하는 이 날의 행사는 지난 시간의 귀감이 되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이 문을 나가면 진짜로 마지막이야. 아직도 아무 생각이 안 들어?"
"잘 모르겠어. 그냥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것 같아."
으이그... 확신의 대문자 T.
입학할 때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마지막 날인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남겼다.
마지막은 곧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지난 3년을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새롭게 맞이할 또 다른 3년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가길 조용히 응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선한 영향력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 축사 중에서
더불어 아들의 사춘기 시기를 낱낱이 파헤치고 기록해 보겠다며 호기롭게 시작한 '예비 중2 탐구생활' 매거진도 졸업을 하려고 한다.
가지 않은 길을 걷기 전에는 두려움이 앞서기 마련이다.
나 역시 풍문으로만 들었던 중학생 아이들의 사춘기 시기가 괜히 무섭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생각보다 어둡고 충격적이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왔다.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우리 집의 '큰 아기'인 아들은 손이 많이 가고, 사소한 갈등도 생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일상 속 작은 스크레치일 뿐이다.
덕분에 녀석의 탐구생활은 지극히 평범해서 책으로 옮길 만큼 거창한 이야기는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매거진에 기록해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아들의 졸업, 그리고 나의 첫 매거진 졸업.
시원 섭섭하다!
아, 그런데 HOXI...
녀석의 사춘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