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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모르는 퀴즈왕

경주, 역사는 계속된다. 4

by JULIE K

동트기 전부터 해 질 때까지 쉼 없이 달려왔던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모처럼 늦잠을 자자 했던 마음과 다르게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걱정되는 마음을 정시키며 살며시 커튼을 젖혔다.


이런!


예상대로 먹구름이 잔뜩 내려앉았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있다. 시계를 보니 5분 뒤면 일출시간이다.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봤다. 차가운 산공기가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구름이 이동하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비가 오긴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깨웠다. 구름에 가려서 떠오르는 태양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일정은 카페부터 시작인데 하늘이 흐리니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여행지에 미리 다녀와서인지 흐린 하늘이 딱히 밉지 않았다.


잠든 가족들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방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딸아이가 깼다. 물놀이에 진심인 녀석은 아침부터 챙겨 먹고 바로 풀장으로 향했다. 렇게 좋을까...


결국 아이들 소원대로 숙소에서 아침시간을 꽉꽉 채워서 보냈다.



"오~~! 생각보다 커!"


다보탑을 처음 본 아들이 탄성을 질렀다. 거대하고 웅장하다며 탑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그러한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처음 봤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좁은 뜰안에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작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커서 친구들과 함께 왔을 때는 그냥 탑이구나 하고 지나쳐버렸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이들과 함께 진지하게 탑의 외형을 감상했다. 똑같은 탑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생김새가 달랐다. 사방에 돌계단을 만들어 보다 화려한 외관에 층수를 가늠하기 어려운 다보탑과 달리 석가탑은 누가 봐도 명확한 3층 돌탑이다.


아들은 석가탑이 훨씬 마음에 든다고 했다. 심플하지만 단아하면서도 품위 있는 것이 요즘 트렌드에 걸맞은 모습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불국사'는 여느 때보다 차분했다.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사찰을 둘러본 뒤 다시 자하문 앞으로 내려와서 백운교, 청운교를 가만히 바라봤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어느 봄날이었다. 잔뜩 흥에 겨운 10대 소녀들은 저마다 꽃을 한쪽 머리에 꽂고 벚꽃나무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수학여행서 빼놓을 수 없는 단체사진도 찍었다. 교복을 입고 티 나지 않게 멋 낸 모습으로 찍은 단체사진은 장의 추억으로 남았다.


"안녕..."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엄마, 누구한테 인사해?"


귀 밝은 딸아이가 물었다.


"그냥.. 엄마 청춘에게 인사했어."


꼬마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참을 앞서가는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하얀 벚꽃나무 아래서 교복을 입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하던 소녀들은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경주에 와서 입 터진 우린 이번에도 그릇을 말끔하게 설거지했다. 지금까지 여행 다니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우니 마지막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에 가기 좋은 곳이다.


운 좋게 바로 주차를 하고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조금 걷지 않아 오른쪽에 커다란 종이 눈에 띄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종 앞으로 걸어갔다.


성덕대왕신종.


에밀레 종으로도 알려져 있다. 20분 간격으로 녹음된 종소리를 틀어줬는데 마침 시간이 돼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웅장한 타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며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연하게도 설 속 이야기인 기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끝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종소리를 뒤로하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입구를 꽉 채워서 내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복잡한가? 듣자 하니 약 10분 뒤에 가이드투어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안내데스크에서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인파를 뚫고 모든 유물들을 꼼꼼하게 관람하는 것은 무리다. 1전시관부터 봐야 하는 전시품들만 골라서 보기로 했다. 아이들도 처음으로 의견에 대찬성을 외치며 크게 동의했다.


첫 번째로 봐야 할 '토우장식 항아리'를 살펴봤다. 직접 빚은 장식이 오랜 세월 견고하게 붙어있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냈던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토기의 아름다운 색감을 눈에 담으며 그다음 전시품 찾아 빠르게 자리를 떴다.


스쳐 지나가면서도 잔뜩 쌓여있는 토기들과 다른 전시품들에도 부지런히 눈도장을 찍었다. 람들이 유난히 모여있는 두 번째로 멈춰 선 곳에 '금관'이 있었다. 천마총에서도 봤지만 위가 어두워서 인지 유난히 더 기품 있어 보였다.


그런데 2전시관에서 꼭 봐야 하는 황금칼인 '장식보검'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분명 빠르게 지나쳐오면서도 한 번씩 다 스켄하면서 왔기에 눈에 띄는 금빛을 놓쳤을 리 없다. 다시 처음부터 둘러봐도 어디에 있는지 꼭꼭 숨어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유리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해당 전시품은 영국박물관 특별전시 '실크로드'에 출품하였습니다.

* 대여기간 : 2024. 9. 4(수) ~ 2025. 3. 21(금)


이럴 수가... 황금칼은 현재 런던 출장 중에 있었다.


국내로 들어오는 수많은 유물들과 그림은 봤었지만 우리 것이 외국에서 전시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 타깃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천년의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가 눈앞에 나타났다. 두꺼운 책 자체를 펼치기 싫어서였을까? 교과서 앞표지에 사진이 실려있을 때는 사실 크게 눈길이 가지 않았었다. 실제로 와서 보니 작지만 영롱함에 빛이 났다. 온화한 미소에 반해서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미소가 아름다웠다.


홀로 우두커니 서서 전시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두고 가족들은 저만치 앞서있었다. 서둘러 거리를 좁히며 그 뒤로도 꼭 봐야 하는 유물들을 찾아다녔다.


줄 서서 하나하나 감상하지 않고 띄엄띄엄 필요한 것들만 찾아다니다 보니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신이 났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모두가 만족스러웠던 박물관 투어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에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이차돈 순교비나 보러 갈까?"


"이차돈이 누군지 알아?"

다시 시작된 아들의 퀴즈시간이 돌이 왔다. 아... 알지.. 이차돈... 불교, 순결? 떠오르는 단어를 필터링 거치지 않고 내뱉었다.


순결이란 단어에 꽂힌 아들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아뿔싸.. '순교'라고 말하는 것이 그만 잘못 말하고 말았다.


"무슨 순결이 왜 여기서 나와."


"나도 안다고 녀석아! 하얀색 피가 나왔잖아!"


엄마의 실수에 까르르 웃는 녀석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 진짜 역사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인가... 드문드문 기억의 조각들이 키위드로만 둥둥 떠다닐 뿐 도무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키워드끼리 조합해서 스토리가 생성되기까지 이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녀석이 질문하는 찰나의 순간에 바로 정확한 대답을 하는 것이 어렵다.


"이사부는 누군지 알아?"


"그럼! 우리 강원도에서 이사부사자공원에 갔었잖아."


끝까지 지지 않고 아는 척하는 나도 끈질기다.


"신라시대 장군이잖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나온다. 신라장군 이사부~~!! 엄마를 놀려먹는데 재미 붙인 청소년은 계속해서 질문공세를 이어갔다.


"흥선대원군은 누구야?"


"얘가 진짜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다~~ 개방한 사람이잖아. 고종의 아버지!"


아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습 질문에 뇌가 고장이 나버렸다. 다급해진 나는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기억력이 안 좋았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과 나는 국립경주박물관의 뜰을 누비며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갔다. 눈물까지 흘려가며 신나게 웃어는 우린 지금 진지하다.


"척화비를 세웠어."


역시나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T답게 웃는 와중에도 할 말은 하는 녀석이다. 척화비.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고자 전국 곳곳에 세운 비석이다.


"야! 그 척화비 저기에 있다. 이리로 와봐. 기념사진 찍어줄게."


장난기 가득한 아들의 얼굴을 척화비와 함께 사진에 담았다.


이젠 진짜 어디를 가든 사전조사를 단단히 해야 할 판이다.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대화의 수준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이차돈 순교비는 안 볼 거냐고! 우리 신라미술관은 안 가봤잖아."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아이들에게 박물관을 더 구경하고 가자고 말했다. 엄마와의 역사퀴즈에서 완승한 아들은 스트레스를 다 털어버린 듯 상큼한 얼굴로 뒤도 안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이틀을 꽉꽉 채워서 보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기다렸다가 역사 깊은 경주에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하지 않았던가! 지식이 풍부해진 녀석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이 많았으리라...


"드디어 동서울에 왔네."


서울에 들어섰다는 말을 듣자마자 딸아이가 말했다.


"이제 다시 경주로 가면 안돼?"


"뭐라고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숙소와 먹거리를 즐긴 딸아이는 지내는 동안에도 하루만 더 머물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우리 가족의 첫 경주여행이 각기 다른 이유지만 모두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우리 올해 초에는 여수에 갔었잖아. 여수랑 경주랑 어가 더 좋았어?"


"어쩌라고! 신경 꺼!!"


???!!!


... 물론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생과 부산스럽게 장난치다가 화가 난 아들 녀석이 외친 말이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도 민망한지 웃어 보였다.


하지만 하필 타이밍이 참...


눈치 없이 저무는 태양이 유난히 아름답다. 이렇게 또 긴 하루가 끝 났다.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에도 누군가의 역사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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