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난 골목길을 원래부터 아는 길처럼 정신없이 걷고 있다. 한옥의 특징을 살린 상점들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간다. 지금 우리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
밥!!
배고픔에 굶주린 우린 열심히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단숨에 목표지점까지 다다랐다. 번개처럼 빠른 스피드로 식당 안의 딱 하나 남은,경치 좋은 자리를 선점했다. 후~~~!!
이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안도했다.
각자 취향대로 1인 1 메뉴를 주문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줄 알았던 메뉴는 코스요리처럼 하나씩 천천히 나왔다. 성미 급한 우린 음식이 나오는 족족 먹어치웠다.
경주에서 유명하다는 피자집이라고 했는데 무슨 맛인지 기억하는 사람? 아무도 없군.
아이들은 예상외로 크림파스타가 입맛에 맞다는 한마디만 남긴 채 맛을 음미할 시간에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속도를 높였다.
누가 입이 짧아서 잘 안 먹는다 하였는가? 소식좌였던 우린 며칠씩 굶은 사람들처럼 접시 바닥이 깨끗해 질정도로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배불리 먹은 우린 뒤뚱거리며 다음 여행지인 '대릉원'으로 향했다. 아들의 일정표에 (점심 - 천마총)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녀석과 같은 나이였던 중2 때 가족여행으로 경주에 왔었다. 무덤 속에 들어간다는 말에 무섭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던 그 시절의 경험이 떠올랐다. 요 녀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엇하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우린 천마총을 향해 직진하다가 요즘 떠오르는 사진 스폿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줄은 길지 않았다. 다만 맨 앞에서 사진 찍던 팀이 15분 이상을 스튜디오처럼 전세 내는 바람에 기다림이 길어졌을 뿐이다.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개인 사진은 물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이들의 독사진과 각자 2인 1조로 기념사진을 돌아가면서 찍었다. 원하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도망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다시 세우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하~~~~~~~
예쁜 사진을 찍어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다 같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곳이면 매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으로 기념하되 함께 보고 즐기고 추억을 만들었으면 한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 팀이 빠져나가자 줄은 원활하게 줄어들었다. 우리 앞에약 10팀정도가 있었는데 우리 차례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초스피드로 인증사진을 박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 우린 그제야 '천마총'을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산책길이 예뻤다. 포토스폿이 따로 없는데? 열심히 줄 서서 찍은 곳보다 훨씬 좋았다. 자유롭게 걸으며 추억을 남기던 우린 드디어 기다리던 천마총으로 들어갔다.
변치 않을 것만 같던 유적지에도 리모델링이란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두컴컴한 무덤 안에 껴묻거리가 담겨있는 목곽의 모습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안으로 들어가니 천마도와 금관, 관모 등 발굴된 유물이 보다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관련 영상도 있어서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말의 안장을 보고 불편했을 거 같다는 아들.. 그 당시 돌로 이렇게 큰 고분을 만들었다는 것과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을 실제로 봐서 신기했다며 후일담을 얘기했다. 반면 힘들어 죽겠다는 딸아이의 마음은 이미 숙소에 가있었다.
그래! 일정표대로 이제 숙소로 가보자!
들어온 입구 정 반대로 빠져나온 우린 차로 가는 길에 황리단 길을 휩쓸며 꼭 먹어봐야 한다는 먹거리를 하나씩 맛보며 걸었다.
"응? 그런데 여기 아까 왔던데 아니야?"
점심을 먹었던 식당이 다시 나오자 뫼비우스 띠에 갇힌 것처럼 도돌이표 되는 길에 다들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숙소에 들어온 순간부터였다. 파란 가을하늘을 어디서나 원 없이 볼 수 있는 숙소 구조와 한껏 세련미를 뽐내는 인테리어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영장을 보고 기뻐하던 딸아이는 가장 먼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피곤해서 물놀이는 안 할 거라던 남편도, 귀찮아서 물에 안 들어갈 거라는 아들도 모두가 행복에 겨워 물장구치는 막내딸의 모습에 결국 함께 물놀이를 즐겼다. 한참을 첨벙 대다 보니 어느새 일몰시간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아들 일정표의 마지막 코스였던 '첨성대'에 가기 위해 서둘러 씻고 다시 외출준비를 했다.
하루가 왜 이렇게 길지? 아직도 갈 곳이 남아있다니..
건물 위까지 내려앉은 태양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거 같은 기세다. 일몰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하지만 그렇지 않은 듯, 하지만 눈은 계속 간당간당하게 걸려있는 태양을 쫓고 있었다.
다급하게 도착한 첨성대로 가는 길이 아름답다. 예쁘게 피어난 핑크핑크한 핑크뮬리가 늦어도 괜찮다고,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우리를 반겨주었다. 온통 핑크빛 세상 너머에 또 다른 핑크색이 하늘에 물감을 칠했다.
경이로운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한 우린 천천히 경관을 즐기며 첨성대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하루를 보상해 주는 하늘은 점차 짙은 노을을 수놓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되는 그림에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노을은 처음이야!"
"나오길 잘했네!"
그림 같은 하늘에 반한 우리도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천년을 넘게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있는 첨성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이곳에서 밤하늘을 관찰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급할 거 하나 없는 온화한 풍경에 동화된 따사로운 모습이다. 정적인 움직임에 마치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들어온 기분처럼 묘했다. 첨성대 주위를 거닐며 이곳에 어우러졌다.
"실제로 와서 보니까 어때?"
"그냥 뭐..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원래 저렇게 기울어져 있는 거야?"
눈썰이 좋은 아들이 좌우 대칭이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며 괜찮은 건지를 물었다.
"그야 세월이 오래되기도 했으니까 여러 변화가 있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지보수를 잘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
실제로 크고 작은 지진을 겪으면서 틈사이도 벌어지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기는 했다.
"저러다가 피사의 사탑처럼 되는 거 아니야?"
"그럼 곤란한데.. 우리도 피사의 사탑처럼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보수공사를 하겠지."
출출해진 우린 근처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그냥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에 진정한 신라의 밤을 보러 가기로 했다.
밤공기가 제법 차다. 혹시 몰라 준비해 온 두터운 점퍼를 꺼내 입었다. 우리가 찾은 곳은 '동궁과 월지'다. 옛 이름을 다시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나에겐 '안압지'로 더 익숙한 곳이다.
제법 깊어진 가을밤, 은은한 조명이 아름답게 수놓은 풍경이 운치 있다.호수에 반영된 누각이 대칭된 모습을 뽐내며 화사한 빛을 내고 있다. 어디선가 가야금 소리가 들려오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가무를 선보이며 즐거운 연회가 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호수 주위를 거닐며 이곳의 정취를 즐기는 사람들을 등지고 곧장 출구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긴장이 풀리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하루가 왜 이렇게 긴 거야. 오늘 도착했는데 체감은 며칠 여행한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