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오후 두 시에 일어나 하릴없이 남의 카톡 프로필이나 훔쳐보다 나 자신이 한심해 창문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옆 빌라는 회색. 다행히 외벽뷰라 팬티에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도 창문을 열어놓을 수 있다. 나도 안다. 다른 이의 삶도 희로애락이 있다는 걸. 근데.. 왜 나만 한심한 것 같을까. 나는 왜 오후 늦게까지 잠이 오는 걸까. 나는 왜 회사를 퇴사했을까. 나는 왜 아직 세수도 안 했을까. 나는 왜. 나는 왜.
퇴사 전 계획은 '안 해본 걸 해보기'였다. 언젠가 방송인 이영자가 삶에 슬럼프가 왔을 때 방향을 바꾸기 위해 안 해본 걸 해봤다는 말이 생각나 세운 계획이다. 계획이라기엔 단출하지만 나는 내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했다. 내가 원하는 직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정적인 순간에 한발 더 내딛지 못하고 그냥 내던져버리는 선택을 하는 내가 싫었다.
나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한창 우울증이 심했을 땐 거리에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도 눈물이 흘렀다. 슬픔이라는 감정보다는 그냥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새어버렸다. 울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음악을 듣지 않았었다. 에어팟이 출시되고 너도나도 무선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닐 때도 나는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안 해본 걸 해보기로 한 이상 오늘은 노래를 좀 들어봐야겠다. 내가 비록 오후 늦게 일어나고 씻지도 않고 누워있는 백수일지라도 음악 듣는 건 할 수 있지.
오늘 내 귀에 딱 꽂힌 노래는 '문어의 꿈'. 춥고 어둡고 차갑고 때로는 무서운 바닷속에서 계속 꿈을 꾸는 그 문어. 나인 것 같다. 산에 올라가면 초록색 문어, 커피 한잔 마셔주면 진갈색 문어, 밤하늘을 날아가면 오색찬란한 문어. 나도 그저 집에서 쉬는 백수 문어일 뿐이다. 취업준비생 문어도 될 수 있고 다시 직장인 문어가 될 수도 있다. 그냥 지금은 집에서 씻지 않고 누워있는 문어일 뿐. sns 사진 속 화려한 사진들을 보며 나는 왜 이렇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지금은 집에 있는 문어일 뿐이니까. 왜 나는 한심할까 생각할 필요 없다. 나는 그저 집에서 쉬는 문어일 뿐이다.
오늘 나도 커피 한잔에 진갈색 문어가 되었다가, 회색 외벽이 보이는 창문을 보며 멍 때리는 문어도 되었었다. 나라고 그냥 누워만 있는 문어가 아니라고. 저녁엔 분리수거를 나갈 테다. 세상 멋진 분리수거하는 문어가 되겠어. 그리고 오늘 밤에는 밤하늘을 나는 꿈을 꿔서 오색찬란한데 날기까지 하는 문어가 될 테다.
나는 문어라고 생각하니 어 이상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깊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내가 문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해진다. 받은 퇴직금이 있으니 돈걱정은 잠시나마 잊고 갈망하던 늦잠이나 실컷 자야지. 내일도 오늘처럼 안 해본걸 하나 해보면 멋진 문어가 될 수 있을 거다. 한 한 달쯤은 문어로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문어로서의 내일이 기대가 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