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고백11> 당신들과 내가 익명으로 만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집 강아지 재재가 눈이 좋지 않더니 그다음 날 아침엔 아예 한쪽 눈을 못 뜨는 거다. 눈병인지 결막염인지, 아님 안구건조증인지 뭔지 아무튼 아이가 눈을 못 뜨고 한쪽으로만 나를 보고 있는 거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그리고 간지러운지 연신 발로 계속 눈을 비비고 있었다.
남편은 출근을 했고, 두 아이들은 방학이며, 내 차는 폐차를 시켰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라서 아이들을 데리고 재재를 슬링백에 넣어 콜택시를 불렀다. 물론 택시에 애견을 태울 수 있나 해서 콜센터에 문의해보고 우리 재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덧붙였다. 2킬로가 채 안 되고 슬링백에 꼭 넣어서 안고(패드, 휴지, 비닐팩 다 준비됨) 택시에 타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그리해도 되느냐고도 물었다. 그랬더니 가능하다고, 택시 기사에게는 따로 전달이 될 거라고 그쪽에서 말했다. 사실 강아지를 키운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강아지를 태우고 택시를 타는 것 자체도 좀 긴장되는 일이라서 콜택시에 우리 강아지에 대한 정보도 몇 번이나 말했고, 당연히 그 정보는 기사님께로 흘러 들어갈 것이며, 애견 탑승을 원치 않는 기사분들은 당연히 거부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펫 택시도 있더라. 아, 놀라워라! 강아지의 모든 것이 처음이니, 내가 너무 무지했던가 싶기도 하지만)
무튼 우리를 태우러 택시가 왔다.
재재를 안고 우리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뒤에 탈 때부터 기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좀 무섭기도 했고. 앞자리에 앉은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기사분은 내가 자리에 앉고 출발하면서 다음엔 택시 탈 때 꼭 개가 탄다고 말하라는 거다.
그래서 혹시 못 들으셨냐고, 여차여차해서 콜센터에 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가능하다는 동의를 받고 택시를 부른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기사님 曰 : 그럼 콜센터 기집년들이 문제네.
순간 숨이 탁.
왠지 나를 겨냥한 목소리 같았다.
뒤에 우리 아이들 둘이 타고 있는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뱉는.
전달을 못 받았으니 기사분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뒤에 말은 기분이 몹시 나쁜 것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 보다도 숨길 수 없는 그의 속내를, 그의 이력을 알게 했다. 그가 누군지 몰라도 그를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가 경멸하는 것들이 오늘은 '나'로 환원되었을 뿐이다.
뺨을 맞은 것처럼, 침 뱉음을 당한 것처럼, 온갖 구타와 조롱을 당한 것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며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다. 그런데 이건 내가 느낄 부끄러움은 아닌데, 내가 당해야 할 부끄러움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 심지어 내리면서 우리 셋은 늘 하던 대로 깍듯하게 인사까지 마치고 내렸다.
나는 내리고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인 남자가 여자에게, 남자라는 무기를 가지고 악의를 담아 던지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지하고 비열한지, 또 한 번 느꼈다. 뭔가 되살아나는 감각,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렁거렸다.
나는 성인 남성에 대한 공포가 있다.
나를 잘 아는 이들에게도 나는 이것에 대해 별로 언급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아마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면, 누군가는 분명히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고, 왜 그런 건지 그 이유에 대해 본능적으로 따져 묻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또는 이야기를 해도 궁금해하는 만큼 이해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두려운 감정에 대해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튼, 이해시켜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피곤함과 관심이 따라붙는다. 그게 불편했고 어느 순간 내가 모자라 보여서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살다 보니 조금 극복이 되나 했다. 극복되는 거 같기도 했고.
내가 돌 무렵 아빠가 돌아가셨으니 아빠라는 존재는 본 적도, 만져 본 적도, 냄새를 맡은 적도, 같이 무언가를 해 본 적도, 아주 약간의 기억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적 나는 성인 남성과 단 한번도 '안정과 보호와 사랑'의 이미지로 친밀하게 접촉해 본 적이 없었다. 불행히 우리 가족 근처에 머물렀던 낯선 남자들의 친절과 연민과 호의는 결국엔 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비교적 익숙한 결론에 이르렀고 꿈에서도 아빠라는 존재를 볼 일은 없었다. 나는 그 모든 관계가 소스라치게 싫었다.
그랬기 때문이었까.
낯선 성인 남성이 이유 없이 나를 바라볼 때, 근처에서 머뭇거릴 때, 함부로 원치 않는 농담을 걸 때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팽팽해지고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침묵했고 뒤로 숨었으며 그들 앞에서 자주 눈을 잃었다.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을 꿈꾸게 했던 것은 지금의 남편이다. 그를 만난 뒤에 나는 가장 먼저 눈을 회복했다. 다른 남자들과도 눈을 마주치며 잘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 봤던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친구 중에 배낭여행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 이유가 비밀을 말하러 간다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이니까. 그래서 내 비밀, 내 수치, 내 과오, 내 약점, 내 고통을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는 거랬다.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거란다. 맞다. 동의한다. 브런치가 나에겐 배낭여행 같은 거다. 친구에게 가족에게 날마다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나의 성인 남성에 대한 공포 같은 것들 말이다. 다 큰 어른이 말이다. 나의 이력에 대해, 나의 안쪽에 대해, 선명하게 말하는 것이 늘 어려웠다. 언어화되지 않는 것까지 살뜰히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또한 사적인 것들이 지나치면 나는 또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사적인 존재로만 남게 된다. 이해란 그런 것이니까.
지금은 많이 치유되었지만 가끔, 불쑥, 그 떨림의 잔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브런치에서 나는 종종 민낯 같은 감정들을 쏟아놓기도 한다. 당신들과 내가 익명으로 만나 자음과 모음을 나누게 될 때, 기교 없는 가여운 문장에도 누군가가 귀 기울여주리라 믿을 때, 나는 더 솔직해지고 대담해진다. 나를 가장 모르는 당신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