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얽힌 이야기는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비교적 적다. 워낙 논과 밭으로 활동 영역이 좁혀지다 보니 그러하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도 엄마의 손을 붙잡고 갔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일터에 계신다. 입학하는 3월이면 아직 쌀쌀한 날씨다. 하지만 쌓아두었던 퇴비를 지게에 지고 가서 논에 다 뿌린다. 이미 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자라서 지게를 질 수 있게 됐을 때 아버지로부터 넘어지지 않고 지게를 지는 방법을 배웠다. 옛 날식으로 농사를 짓던 시절의 얘기다. 보리를 베어 묶어서도, 벼를 베어 묶어 논둑에 말린 다음 역시 지게로 집에까지 메고 온다. 어깨와 허리에 멍이 들만큼 힘이 든다. 우리 집에서도 리어카는 조금 후에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도 두 개의 통을 물지게로 지고 집에 와서 묻어 놓은 커다란 항아리에 채워 쓰도록 했다. 물이 담긴 통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게 요령이다. 아버지에게서 보고 익힌 것이다.
송아지를 기른 적이 있다.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낫으로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다친 일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까 조마조마하며 숨겼는데 어떻게 알고 주의 사항을 가르쳐 주셨다.
벼가 익어갈 무렵이면 논 가운데 고랑을 만들어 물이 잘 빠지도록 한다. 논 바닥에 있는 풀을 손으로 제거한 상태라서 깨끗하다 할 수 있다. 이때 꼭 하는 일이 있다. 만들어진 고랑을 처음부터 더듬어 숨어있는 보물 찾기를 하는 시간이다. 나는 양동이를 들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면 된다. 논의 물이 고랑으로 모여 아래 논으로 흐르면서 발자국 속에 숨은 붕어, 우렁이, 참게 등이 아버지 손에 걸린다. 뒤에 있는 내게 주시면 들고 있던 그릇에 받아 담으면 된다. 끝까지 마침표를 찍으면 그릇에 가득하다. 이것들로 끓여주신 엄마표 우렁 된장찌개의 맛과 붕어 매운탕 맛이 그립다. 참게를 간장에 담갔다가 먹었던 고향의 맛을 되돌리기 어려우니 아쉽기만 하다.
고구마는 겨울 양식으로 좋은 먹거리이다. 추위가 오기 전에 캔 고구마를 저장하는 게 큰 숙제다.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저장한 해가 있었다. 나름대로 좋을 듯했지만 그 해가 유난히 추워서 고구마가 상하여 마음 아팠던 일이 되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방 한 구석에 짚으로 망을 엮어 보관하여 겨우내 삶아 먹을 수 있었다.
흙과 더불어 지낸 농사꾼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
정직한 분이셨다. 거짓을 모르시는 아버지다. 가뭄이 있을 때 농수로를 통해 물이 공급되면 순서를 거스르지 않는다. 위 논부터 차례차례 순서 대로 물을 댄다. 그야말로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경지정리를 하여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논둑인데 아래 논 임자가 작년에 심었던 벼 포기까지만 파내야 하는데 이를 어기고 더 바깥쪽으로 침범(?)하는 것을 말도 못 한 체 가슴앓이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아버지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러고 보니 인내심이 대단하시다. 이웃과의 정을 생각하여 그냥 참고 침묵으로 지나쳤으니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내가 미국을 방문하여 여러 곳을 방문하고 공부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1979년 가을의 일이다. 방문 비자로 들렸다가 더러는 편법으로 귀국하지 않는 일을 만든다는 비판이 있던 때다. 나는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고민 중이었다. 산호세 쪽에 머물러 있을 때다. 외줄 하고 돌아오니 머무는 집 목사님에게 한국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위독하며 넷째 오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시무 중인 교회에서도 혹시 귀국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즉시 여행사에 연락하여 비행기 표를 구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22일 늦은 저녁 시간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곧바로 서울 역으로 향했다. 경부선 기차에 몸을 맡겼다.
다음 날 새벽 대전역에 도착하니 세 형들이 모두 나와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큰 형 집으로 가는 중이다. 날이 밝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도착하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못해 묘한 기분이다.
"아버지가 넷째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지난달에 돌아가셨다." 큰 형의 말이다.
"예." 멍하다.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한 대 맞은 느낌이다. 나는 울음조차 잊은 채 할 말도 잊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귀국을 미룰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위독하다고 연락했다는 얘기다. 아버지, 당신은 모르고 지냈으나 이미 위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은 상황이라서 74년의 삶을 마감하셨다. 열 남매 중 유일하게 임종을 지켜볼 수 없었고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해 불효의 아픔을 안게 되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