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나흘째다. 멀리서 들려오는 수탉의 날갯짓이 울음소리와 함께 실려온다. 새벽이 열리다. 지난밤은 깊은 잠을 잤다. 석유 등잔에 불을 켜고 옷을 입고 알어서다. 다리에 힘이 생긴다. 바위틈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얼굴을 씻는다. 손에 닿는 감각에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두 눈도 쑤욱 안으로 들어간 듯하다, 몇 모금 물을 마심으로 목을 적신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이다. 길게 펼쳐진 천막 재료인 파란색 천이 깔려있고 방석이 놓였다.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시간이다. 속이 비었으나 먹는 것을 포기했으니 이제 평온을 찾았다.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굴에서 나와 숲 속 좁은 길을 따라 걷는다. 산 아래는 봄기운이 꿈틀거리겠지만 산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 오려는 봄을 시샘하고 있다. 그래서 두터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두 다리가 약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걷기로 다짐을 했다. 집에 있어도 조깅을 하는 시간이다. 어떤 이는 금식하면서 힘이 약해져 누워서만 지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면 여러 날이 지나서 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는 억지로라도 하루 두 차례 걷는 시간을 정했다.
8시부터 12시까지는 앉아서 성경을 읽는 시간이다. 오후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기에 하루 백 페이지 정도를 읽으며 음미한다. 당연히 빨리 읽기보다는 천천히 읽기로 하다. 존 웨슬리(Jhon Wesley)를 가리켜 오직 한 책의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사역의 기초는 바이블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지만 많이 읽는 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 읽어도 말씀이 삶의 현장에 녹아내리는 적용이 되어야 함이 중요하다.
오후 휴식시간을 겸하여 걷는 시간이다. 모처럼 따스한 봄볕이 내려 쪼인다. 이곳에 나보다 일찍 와서 지내고 있는 청년 둘이 있다. 정신 수련을 위해 머무르고 있어 하산하는 날은 기약이 없다. 오늘은 둘이서 아궁이에 때는 나무를 나르고 있었다. 나도 운동이라 여기고 몇 차례 날랐다. 가벼운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청년들이 "우리가 할 일이니 그만하십시오." 하기에 그냥 지켜만 보기로 하다. 역시 일이라고 피로가 찾아온다. 방으로 들어와 앉으니 약간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다. 맥박이 고르지 못한 까닭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90을 넘길 때도 있고 겨우 60을 헤아릴 때도 있다. 육체적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보다 더한 괴로움이 있음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리움이다.
공동체의 얼굴들이 하나, 둘 스크린에 펼쳐지며 지나간다. 일상을 벗어나 비켜서서 바라보니 그립다. 갑자기 보이자 않는 아빠를 찾을 어린 남매의 모습, 일정을 마칠 때까지는 절대 산에 오지 말라고 거듭 부탁했던 아내의 모습도 그리움에는 예외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