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무릎을 달래며 움직이는 어색한 아내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으리라는 생각도 해봤다. 55년을 함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가정과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희생한 결과라 생각하니 더욱 그러하다.
"여보, 고생 그만하고 수술을 합시다."
이미 수술을 하고 편히 걷는 이들도 수술을 권유한다. 친분이 있는 내과 원장은 맹장을 제거하는 정도로 여기면 된다며 편안한 맘 가지라고 한다. 그럼에도 아내는 칼을 대어 몸을 찢고 피를 흘린다는 상상을 하니 겁부터 나서 망설여진단다. 그러나 4기가 되어 늦었다는 담당 정형외과 원장의 의견을 받아드려 수술을 하기로 했다.
2025년 1월 첫 주말이 지난 화요일 입원 준비를 하고 가까이에 살고 있는 딸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절차를 따라 병실이 정해졌다. 간병인 통합병원이라서 가족이 같이 머무를 수 없게 됐다. 내일은 왼쪽, 일주일 후 오른쪽 무릎을 열어 인공관절을 넣는 수술 일정이다. 아내는 입원실로 보내고 딸과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 문을 열었다.
적어도 20 여 일은 혼자 지내야 한다. 이렇게 긴 기간을 아내와 따로 지내는 일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처음 일이다. 마침내 전업 주부의 일정이 시작됐다. 저녁밥을 해야 했다. 혼자서 먹어야 하는 밥을 하기가 어렵다. 쌀의 분량, 물은 얼마나? 나의 아버지는 아무리 배가 고프셔도 어머니가 차려주기 전에는 그냥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던 일이 생각나는 까닭이 무언지 모르겠다. 아내가 하던 대로 쌀 반 공기를 씻어 작은 돌솥에 물을 적당히 부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불을 켜고 잠시 후 약한 불로 줄이며 시간을 확인하다.
작은 돌솥 뚜껑을 열었다. 밥 익은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운다. 밥은 질었고 불을 일찍 끈 탓에 제대로 되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는 전기밥솥을 이용하여 하루 먹을 양의 밥을 해야겠다. 반찬은 아내가 미리 준비한 기본적인 것들이 냉장고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멸치 볶음, 콩자반, 코다리 찜. 김치찌개는 비닐봉지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보관했다. 궁금하다.
설거지와 청소도 주부의 손길을 기다린다. 혼자 밥을 먹은 그릇은 간단하지만 가족이 많으면 설거지도 일이 많아진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 전 차가운 느낌의 찬물이 온몸을 짜릿하게 한다. 청소를 하니 옛 방식의 모습이다. 빗자루를 들고 거실과 방을 쓴다. 그런 다음 청소기로 기계소리를 내며 먼지를 흡수한다. 바닥을 대걸레로 닦아주는 것으로 마친다. 세탁기 시작 버튼 누르는 걸 잊을 뻔했다. 세탁기를 돌린다. 쓰레기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세 개의 비닐봉지를 종이박스에 세워 놓았다. 종이, 비닐 종류, 플라스틱 및 캔 등을 넣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음식 쓰레기는 주방에서 따로 모으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음식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하게 되어 마구 버리던 음식물 쓰레기 양이 줄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사간이 빠르게 흐르는 느낌이 들 만큼 쉴 틈이 없이 지난다. 수술 결과가 궁금하다. 옷을 갈아입고 큰길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시내버스를 한 번 타면 10 여 분 후 아내가 입원한 병원까지 갈 수 있어 편리하다. 면회 시간이 평일에는 오후 6시로 한 차례만 주어진다. 수술한 날은 예외적으로 수술실에서 병실로 이동하는 시간에 잠깐 만나기 위해 일찍 나왔다. 오전 11시가 지나서 간호사와 직원들이 수술실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로 아내를 입원실로 옮기는 모습을 지켜본다. 잠깐 머무르는 2인실 병실로 안내됐다. 수술은 무리 없이 잘 됐다는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의 모습도 편안해 보였다. 통증도 없기에 다행이다 싶다. 방학동에서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 승언이를 데리고 바쁜 틈을 내어 병원에 왔다. 함께 위로의 말을 나누고 병원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걸어 병원 건너편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들 가족과 갈비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귀가하다.
아내가 집에 없어도 마치 곁에 있는 듯 행동하는 나를 본다. 예를 들면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올 때도 열고 닫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는 모습이다. 저리에 없을 뿐 늘 같이 있다는 생각이다. 아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 계기는 구정 전후에서다. 아내가 없는 상황에서 구정이기 때문에 준비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설날 이틀 전에 퇴원은 했으나 양쪽 무릎 수술을 하고 재활 중이기에 주의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몸으로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며느리가 해 온 음식으로 설날 아침 식탁을 나눴다. 첫째 손녀가 좋아하는 두부 찜, 손자가 찾는 할머니표 육개장이 빠졌고 둘째 손녀가 즐기는 우엉조림과 오징어 채 볶음이 보이지 않아 아쉬운 명절이 되다. 아이들은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위로 손녀와 손자는 둘 다 예술 고등학교를 우리 집에서 다녔기 때문이다. 황혼 육아를 한 셈이다. 할머니 손 맛이 기억 저편에 선을 그은 자국이 있어서가 아닌가? 셋째는 반찬을 만들어 배달했으므로 입에 익숙한 탓이기도 하다. 아들, 며느리 바쁘다고 김치를 담가 전철로 중간 지점인 서울역에서 전하고 받는 좋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한 장 두 장 모아진 따뜻함이 맛의 향연으로 엮어졌으리.
주부. 전업주부의 하는 일을 어찌 값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사랑과 희생 그리고 땀의 수고가 어우러진 소중함이 녹아져 있음을 배운다. 고마움 가득한 맘이다.
"할머니, 다음 설날에는 추억으로 가는 손 맛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