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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만난 사람들

by 이상수

아파트 건축과 함께 건축회사는 도로 건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도 나란히 세웠다. 학교는 살고 있던 지역 주민과 새로 입주하는 입주민들을 위한 배려라는 것은 물론이다. 아파트는 중심메서 조금은 외곽지역이지만 옅은 산에 울창한 숲이 있어 좋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깨우고 부지런한 이들의 산책로가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연다.

운동장은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과 수업이 끝난 후 일정한 시간까지 주민들을 위한 개방시간으로 정문이 열린다. 운동장에 오는 이들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 분들이다. 하는 운동은 그냥 걷기다. 1시간 동안 걷는 이, 어떤 이는 어김없이 20분을 정확히 지킨다. 운동장에 도착하여 20분이 되면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다. 보기에 젊다고 생각되는 이는 뛰어서 몇 바퀴를 반복해서 돌기도 한다. 대부분 매일 나오는 얼굴들이다.


철학관을 운영하는 50대 후반의 여인은 특유의 입담을 자랑한다. 서울에도 아파트가 있고 자기를 돕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듣는 이들은 잠시 넋을 잃고 대단하구나 싶다 하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면서도 뭔가 의심의 그늘을 품는 이도 더러 있음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단순한 남자는 아니고 예민한 여자의 감각이 갖는 느낌이다. 그중에서 특이한 성격의 두 할머니는 며칠 후 기어코 철학관 간판이 걸린 여인의 전셋집을 찾아갔다. 집주인은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조금은 당황하는 눈빛이 피부에 와닿았다. 여인은 숨기려다 들킨 듯한 표정은 머쓱함이었다. 차 한잔 대접받고 서둘러 나왔다. 다음 날 운동장에서 다시 만난 철학관 여인은 말 수가 줄었다. 아니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 보이는가 싶더니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두 여인은 다른 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이 있을 따름이었다.


딸이 검사인 아주머니는 당당하면서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면이 있다. 딸을 자랑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겸손하게 자신의 목표만 도달하면 집으로 간다. 그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검사 엄마가 오늘은 바쁜 일이 생겼나 봐? 하고 관심을 보인다.


그중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는 아저씨 한 분이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펼쳐 머리를 가리고 걷는다. 나는 그분에게 '개근상'을 드립니다 하며 격려했다. 아저씨는 폐암 환자로 여러 차례 항암 주사를 맞고 요양 중인 모습으로 우리 동네 아파트로 최근에 이사를 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걷기조차 힘겨워했다. 그러나 나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산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 아저씨 곁에는 운동장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퇴역 장교 출신이 있다. 이미 70대 초의 나이임에도 아주 건강해 보안 더. 맨발 걷기의 열풍에 힘입어 주 선생님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맨발 걷기의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 매우 강력하게 맨 벌 걷기를 권했다. 지금은 되찾은 건강을 감사하는 맘으로 얘기한다.


며칠 째 보이지 않는 언니의 얼굴이다. 회사에 다니는 큰 아들과 교사인 둘째 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이 엄마를 위해 빵을 사 오는 날이면 다음 날 종이봉투에 몇 개를 담아 갖고 온다.


"아우님, 맛있는 빵이야. 먹어봐"

"뒀다가 형님이나 드시지 갖고 오셨어요?"

"나눠 먹어야지"

"고맙습니다"

아내와 주고받는 대화다. 아내도 김치를 담그면 전하기도 했지만 받는 게 더 많은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님이 운동장에서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해도 연락이 안 된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연락이 됐다.

"아우님, " 말에 힘이 없이 들린다.

"네, 형님. 어찌 되신 겁니까."

"나 지금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어."

"그러셨군요. 편안히 계십시오." 전화를 내려놓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두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느낌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운동장을 크게 한 바퀴 도는 트랙이 비로 쓴 자국이 보인다. 맨발로 걷고 달릴 수 있게 작은 돌멩이도 제거한 것이다.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퇴근 후 에라도 꼭 둘러서 빗자루로 쓸고 정리를 한다. 걷다 보니 키가 크고 한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 등 위에 빗자루가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순박함이 마치 라벤더의 향기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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