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그 자리
오랜만에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고 있는
성탄절 오후이다.
이런 날은 정말 오랜만인데
그만큼 몸이 힘들었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 와중에 남편이 산책을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한다.
단호하게 거부한다.
춥고 허리도 아프고 컨디션이 나쁠 때는 집콕이 최고라고 배웠다. 나의 엄마에게.
남편은 그럴수록 운동을 해야한다는 주의이다.
나는 안된다.
나의 한계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결국 남편은 해가 떨어져가는 세시반
운동을 하겠노라고 집을 나선다.
그를 말릴 비법은 시어머님빼고는 없다.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무언가를 먹었다가
제주도 여행 유튜브를 봤다가 하는 와중에
탄소중립 연구팀에서 자가진단도구 웹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 해서
사이트에 접속해서 이것저것 의견을 남기고는
(아직 손 볼 것은 많아서 일요일 밤 줌회의가 예정되어 있다.)
일단 일어난 김에 성적 자료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이상은 없는데(이상이 있으면 시스템상 저장이 안된다.)
학점이 D가 나가는 학생들이 마음에 조금은 걸린다.
특히 졸업 학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물론 학점에 상관없이 졸업은 확정되었을테지만 마음이 그렇다.
사실 내 강의에서 C, D 학점은 그리 많지는 않다.
중학교에서도 수행평가 점수가 후한 편이었고
대학에서도 절대 박하거나 짠 편도 아니고
과제를 내는 편도 아니다만
C, D 학점은 출석점수도 그렇고 시험 점수도 주어진 점수의 50% 정도만 확보했다는 경우이다.
고민의 기로에 서있다.
D는 주지 말까?
사실 학생들 사이에서의 점수 주는 스타일은 한학기만 지나면 모두가 공유하게 되어서
내년 강의 선택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기 마련이다.
내일 오후까지 마지막 고민을 해보려 한다.
그리고는 1992년에 만든 책 <꿈 그리기>를 꺼내들었다.
이번 책부터는 출판사와 함께 만든 것이다.
아마 판매대에도 올라갔었는데(교보문고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팔렸을리는 없다.
판매량과는 상관없이 자비출판비를 지불한 형태였다.
대부분이 신혼초 남편과 아들 녀석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때의 글들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다음 글은 아들 녀석이 천재가 아닐까?
잠시 흥분하게 만들었던 일화를 쓴 것이다.
[길모퉁이 마다
노랗고 노란
봄빛을 보며
네 살박이 아들 녀석에게
개.나.리.를 가르쳤더랬습니다.
개. 나. 리.
길게 따라 부르는 아들 녀석의 하얀 이빨 틈새에서도
봄빛이 하나 가득 새어나왔습니다.
변덕스런 날씨와 호된 감기 끝에
오랜만에 햇빛을 다시 보게 된 오후에
아들 녀석의 시들해진 얼굴이 보였습니다.
엄마. 개나리들이 모두 코코 자나봐.
아이는 잠들지 않은
개나리를 찾느라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계절의 변화를 설명할 자신이
나에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잠들지 않는 꽃은 없다는 걸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너를 보며 봄을 느끼게 된다는 엄마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이렇게 개나리보다도 이뻤던 아들 녀석이
지금은 함께 늙어가고 있다.
내가 늙어가는 것에는 담담한데
아들 녀석이 늙어가는 것은 보기에 힘이 든다.
내일 건강검진이라고 8시부터 금식이라하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다 큰 아들임에도.
이 세상 엄마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다.
어머니라는 그 자리는 평생 마음을 자식에게 모두 내어주는 자리이고
쌀쌀하기만 했던 나의 어머니도 물론 그러셨을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