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뿌듯하게 사온 밑반찬을 깔고 점심을 먹고나니 힘이 나는 것도 같다.
이유가 있기는 하다.
성적 처리도 완결했고
다른 서류 제출도 완결했고
이제 남은 것은 탄소중립연구 마무리라는
가벼운 마음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건강검진을 무사히 마쳤다는 아들 녀석 톡을 봐서일 수도 있고.
여하튼 갑자기 기운이 나고 추위가 많이 무섭지는 않아서
(배가 부르면 사람이 이렇게 용감해진다.)
남편의 운동 겸 산책에 동행하러 나섰다.
지난번 그 저수지 물이 꽁꽁 얼었을지 궁금하기도 해서 말이다.
저수지 물은 신기하게도 얇은 얼음이 떠 있는 부분도 있고
꽤 두꺼운 얼음에 눈까지 덮여있는 부분도 있고
아예 녹아서 물이 흐르는 것이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햇빛을 얼마나 어떤 각도로 오랫동안 받느냐에 따라 이리 달라진다.
어느 예술가도 이렇게 만들어낼 수는 없다.
내일 대문 사진으로 쓸 예정이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길을 걷고 걸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까지 갔다가(남편도 나도 초행길이다.)
집에 오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고
발가락의 티눈이 또 조금 아파왔지만
오늘은 적어도 집콕만 한 것은 아니라는 위안감에 기분이 슬며시 좋아져서
폭풍 연구 마무리를 진행했다.
낮잠도 안자고 말이다.
그리고나니 어정쩡한 시간이다.
저녁은 김밥에 고등어김치찜인데(어울리지는 않는다만)
지금 준비하기는 너무 이르고(남편의 저녁 식사 시간은 8시이다.)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그런 시간인 셈이다.
결국 나는 옛 책을 꺼내들었다.
1996년 출판된 제법 책다운 냄새가 난다.
물론 겉 모습과 디자인이 그렇다는 것 뿐.
글은 전혀 그렇지 않아 다시 읽으면 창피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똑같은 생각의 글이 있다.
에필로그이다.
[글을 쓴다는 것.
작년 이맘쯤이었을 겝니다.
글을 쓰는 일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거라고 단언한 것이
그리고 일년여.
여전히 글을 쓰는 기쁨은 소중하지만
글을 씀으로 인해 생기는 안타까움과 가슴 저림도 있다는 걸 절실히 느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의무감처럼
다시 한번 그동안 써놓은 글을 책으로 내어놓습니다.
아직은
잊혀지지 않은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간 스쳐갔던 많은 사랑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을런지요?
그건 제 자신에게도 커다란 의문부호로 남습니다.
제가 제 삶을 사랑하는 한
그리고
주위의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아마도
제 글쓰기는 계속되리라 생각해 봅니다. ]
이렇게 책을 내고는 늦은 나이에 박사학위과정에 들어가서 논문 형태의 글만 쓰고 접하는 동안
정말 글이라고는 하나도 쓰지 않고 살았었다.
가끔 쓰던 편지나 엽서글 조차도
다시 이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마 브런치 글을 모아서 책을 한 권 내자는 믿어지지 않는 제안이 들어온다면(상상만으로도 기쁘다.)
그때 에필로그도 아마 이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그럼 1996년 이후로 나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것일까?
그건 분명 아닐텐데 말이다.
물론 기쁨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진 프롤로그도 있긴 하다만
그것을 여기에 올리면 내 볼이 빨개질 것만 같다.
하나의 책인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이렇게 정반대 느낌이기도 아마 쉽지 않을테지만
촛점은 똑같다.
계속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