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못자면 졸리게 되어있다.
내 마음 속의 최고.
아들 녀석이 저쪽 방에서 자고 있는데
왜 나는 잠을 지독하게 설친 것일까?
요 근래 최악이다.
꿈속에서도 음력이긴 하지만 한 해를 보내기가 싫었던 것일까?
일단 나의 트레이드 마크인 초저녁잠이 오지 않았다.
아들 녀석과 함께라는 기쁨에서 였다고 치자.
아들 녀석에게 내가 좋아라하는 <불꽃야구> 명장면 보기를 강요하고
다친 다리를 자꾸 괜찮을지 봐달라하고
방금 저녁과 과일까지 먹은 녀석에게
남편은 자기가 주문한 쑥떡을 먹겠냐하고
나는 내가 주문한 치즈케잌을 먹겠냐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하고
(살쪘다고 지속적으로 구박하는 중이다만)
열시 조금 지나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11시 반에 깨고 두 시 반에 깨고 다시 네시 반에 깼다가 다섯시 반에 이제는 모르겠다하고 일어났다.
거의 신생아 수준이다.
신생아도 어디가 불편한 신생아인 셈이다.
아들 녀석이 와서 좋아서 그런 것일수도
마음속에 내가 딱히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불편함이 있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다만
여하튼 가뿐하지 않은 설날 아침이다.
괜찮다.
아침 먹고 아들 녀석이 차를 가지고 일찍 출발할 예정이니 그 이후에 낮잠을 자면 된다.
잠이 모자라면 졸리게 되어있다.
그때를 기다려 자면 된다.
이렇게 자주 깬 날이면 기억도 잘 안나는 야리꾸리한 꿈들을 꾸곤한다.
그래서 더 피곤한 것일지도 모른다만
여하튼 어제 마지막 꿈은 강의가 십오분 남아서 소스라치게 강의 장소에 뛰어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생뚱맞게 이화여대 앞이었다.
물론 강의 장소는 그 곳이 아니었고 화들짝 놀라움에
그 이전 꿈의 내용들은 모두다 기억이 휘발되었다.
마지막 말만 기억난다. <어머, 미쳤나봐.>
이대 앞 냉면이 먹고 싶은 것일까?
아직 캠퍼스에 꽃은 안 피었을텐데 말이다.
꽃이 가득 핀 4월 말에서 5월의 이화여대는 캠퍼스로만 본다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이쁘다.
그래서 외국인들도 그리 많이 찾던 곳인데
이제는 진입로 상가들의 공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그 건물들 주인들이 나보다 백배는 더 부자인데 말이다.
봄이 온 절정 즈음 이화여대가 직장이었던 제자 녀석과 그 익숙한 캠퍼스도 걷고 냉면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녀석이 그때 한국에 있을지는 모르겠다.
명예 퇴직 후 부부가 해외 한달 살기를 멋지게 수행중이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따뜻한 곳으로다가만.
설날 아들과의 한 끼를 위하여
그리고 부모님께 인사를 위하여
새 밥을 밥통에 올려두었고 이제 생선 한 마리 굽고 탕국만 뎁히면 된다.
일단 부모님께 올릴 예정이라 마늘과 파 종류를 넣지 않았다만 그 후에는 넣어서 다시 끓일 예정이다.
나머지는 모두 다 전통시장 반찬집 것들이다만.
큰 그릇에 원하는 나물을 넣고 탕국으로 간을 맞추어 먹는 비빔밥은 돌아가신 시아버님께서 명절 제사 후
손수 비벼서 나누어 주시던 음식이다.
아들 녀석은 그것을 좋아라 했고
나는 원래 비빔밥을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다.
다음 주 월요일이 현충원에 계신 시아버님 기일이다.
아침 잘 드시고 티비 보시다가 눈이 안보인다하시며 소파에 누웠다가 돌아가셨다.
며칠 전 오래된 모임의 지인 어머님께서 아침 잘드시고 목욕하시고 잠시 누워계신다 하시더니 그렇게 꿈꾸듯이 가셨다 한다.
물론 구정 명절이라 상을 당한 부산까지 가는 티켓이 없어서 다들 고생한 듯 하지만
가는 분께서 아프지 않고 고생하지 않으셨으니 호상이 틀림없다고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부러운 방법으로 먼 길을 잘 떠나는 분이 계신가하면
5년 이상 누워서 꼼짝 못하고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몇 번씩 드나들면서 고생하는 내 동생과 같은 사람도 있다.
엄마, 아버지 식사상을 차리고 절을 하면서(목례이기는 하다만) 마음속으로 빌어보련다.
고생하는 셋째딸을 거두어서 옆에 데리고 있어달라고.
분명 잘 알고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하고 있는 중이실테니 말이다.
설날 새 아침부터 눈물이 찔끔 난다.
못잔 잠은 다시 자면 보충이 된다지만
친정부모님과 아픈 동생 생각에 흘린 눈물은
쉽게 보충할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