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3일차 리뷰

소원을 빌어봐.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들이 왔다. 15분 연착한 기차를 타고.

명절은 명절인지 기차가 15분까지 연착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아들이 기차에 탔다고 톡을 보낸 후

나는 조치원시장에 가서 아들 녀석과 함께 먹을 비빔밥용 나물과 녹두 빈대떡 한 장과

맛나 보이는 겉절이와 파김치를 조금씩 샀다.

도착 시간에 잘 맞추었나 싶었는데 15분 연착이라 연락이 와서 잠시 고민했다.

역 앞 커피숍에 갈 것인지

(아무 커피나 먹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무엇이냐?

스벅이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갔을 것이다.

언제부터 내가 스벅 마니아가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는 없다만.

분명한 건 서울을 떠난 후 라는 것 뿐이다.)

아니면 아직 완전치 않은 다리로 조금 더 걸어다닐 것인지.

그런데 지난번 역 앞 커피숍에서 엄청 쓴 커피

한 모금을 먹었던 것이 기억이 나서 후자를 선택한다.

조치원 성당을 검색해본다.

시내에 나온김에 기도나 한번 드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다.


오래전부터 성당을 나가지 않는 냉담자이지만

지나가다 성당이 보이면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리기는 한다.

명동을 지나다가는 명동 성당에

사직동을 지나면 사직동 성당에

어린이 대공원 산책길에는 구의동 성당에

잠시 잠시 기도를 올리곤 했었다.

이곳에서는 물론 가본 적이 없는데

오늘 마침 지도를 보니 다녀올만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기차의 연착으로 인해 말이다.

오래된 폐교를 고친 느낌이 드는 조치원 성당에서

나는 네가지 기도를 올렸다.

냉담자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거 아니냐 싶다만.

[ 아픈 동생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아들 녀석에게 짝이 생기게 해주세요.

아픈 남편이 심하게 아프지는 않게 해주세요.

남편 공장이 꼭 팔리게 해주세요.

위 네가지 중에 제발 한가지만이라도

이루어지게 도와주세요.] 라고 간절하게 말이다.

다음에는 초에 불이라도 켜야겠다는 마음도 먹었다.

오늘은 잔돈이 없었다.

초에 불켜고 기도하는 것은 유럽 성당에서 딱 한번 해보고는 안해본 것이다.

유럽 여행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성당이다.

내 생애 딱 한번 가본 유럽이지만 그랬다.


두 달여 만에 본 아들 녀석 얼굴은 아주 못되지는 않아서 마음이 놓였고

생각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은 아니라 약간은 실망했으나

늦은 점심을 먹고는 내 알바 리스트를 일사천리로 하나씩 처리해주어서 기분이 업되었다.

1. 고양이 사료 신청과 사료 넣어둔 곳 문고리 단단하게 정리

(사료 이름 찍어서 로켓 배송에서 찾아서 앞으로도 계속 내가 할 수 있게 알려주었고 문고리는 십자 드라이버로 짱짱하게 정리해주었다.)

2. 프린터 토너 구입 신청과 스캔하는 방법 배우기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던 프린터 모델명과 토너 모델명을 확인하고 로켓 배송을 신청해주었고

오늘의 제일 어려운 미션인 스캔도 여러차례 매뉴얼을 살펴보더니 성공해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나중에 잊어버릴까싶어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3. 재미나이 프로 버전 같이 사용할 것인지와 유료 신청하는 방법 체크하기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재미나이 프로버전을 이미 신청해서 사용 중이라 하고

가끔 내 업무를 봐줄 수 있냐하니 사용 내역이

다 남으니 절대 안된다고 칼같이 짤랐고

내가 유료를 쓸 필요까지 있는지에 대해 내일까지 함께 고민해보기로 하였다.)

4. 에어컨 렌탈 견적 비교 및 신청 일정 논의하기

(곧 서울에 내가 올 것이니 나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기존 청소기 렌탈과 함께 에어컨 렌탈을 묶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약속해주었다.)

미션을 다 완수한 아들 녀석에게 나는

세뱃돈 겸 알바비를 후하게 쳐주었고

그후로는 카페에 가서 일을 한다는 핑계로 나갔으며

저녁 식사 시간 전에 들어오겠다 했는데

밥 먹으면서도 자꾸 카톡을 하는 것과 언뜻 본 카톡에 약간 핑크빛이 느껴져서 좋았다.

내 오해나 망상일수 있다만

그래서 카페까지 눈치없이 굳이 따라나가지는 않았다. 잘했다.


저녁은 소고기 구이, 양념 돼지갈비 구이

(물론 모두 한 팩씩이다.)

그리고 아들 녀석의 픽을 받은 박대구이이다.

전통시장에서 사온 빈대떡도 있고

너무 심심하게 간이 되었다고 아들 녀석에게 핀잔받은 잡채도 있다.

아픈 남편 위주로 간을 맞추다보니 너무 심심하고 밍밍한가보다.

양념 돼지갈비는 단짠단짠으로 해보겠다.

저녁을 먹고나서 나와 같이 <불꽃야구> 지나간 경기 유튜브를 봐준다면 더할 나위없겠다만

과연 그래줄런지는 모르겠다.

지 아빠를 닮아서 그런쪽으로 센스가 별로 없다.


참 고양이 설이는 꿈에 그리던 오빠가 왔는데 생각보다는 별로의 반응이다.

이제 설이 마음에는 내가 1등인가보다.

그런데 어쩌냐.

개강하면 나도 서울에서 며칠 지내는 스케쥴이 될 지도 모르는데. (아마도 그럴 것이다.)

설이가 눈에 밟혀서 어쩐다냐.

그때 서울에 며칠 있다가 내려오면

지금 오빠를 보는 표정으로 설이가 나를 맞이해준다면 나는 많이 서운할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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