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길이라 쓰고

소심한 복수라고 읽는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어제 남편과 아들 녀석의 스타일에 대해

말다툼을 벌이고는

욱하는 마음에 오늘 어딘가를 나가야겠다 싶었다만

마침 자동차도 아들 녀석이 서울로 가지고 으니

난감하다.

골프 약속은 아니라하는거보니

데이트가 분명한듯 해서

아무 말도 하지않고 운전 조심하라고만 하고

기꺼이 차를 주었다.

사실 주차장에 세워만두고 있었다.

진작 줄걸 그랬다.

그러니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걸어가거나 기차타고 가는 곳이어야만 한다.

재빨리 기차 티켓을 살폈는데

오호라 대전까지 왕복 표가 있는걸 보고 냉큼 티켓팅을 했다.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명절 마지막 날에 티켓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대전 사는 친구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작년 이맘때쯤 남편을 대장암으로 보냈고

나를 보면 그 심정을 안다는 듯한 눈빛과

관련된 말들을 쏟아낼듯 하여 가급적 만남을 피하는 중이다.


오늘 아침 조치원역은 명절 마지막날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조용하기만 했고

내 특기를 발휘하여 삼십분 앞당겨 대전역에 내렸다.

무엇을 할지 딱히 결정한 것은 없었는데

대전역에 내리자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났다.

성심당 내가 좋아하는 빵 이름에도 등장하는 보문산이다.

대전을 감싸고 있다는 네 개의 산 중 하나이고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는걸

작년 <불꽃야구> 직관에 와서 알았다.

야구장에서 조금만 더 가면 보문산이더라.

그리고 사실 올해의 직관에 대비해서 사전점검을 가보고도 싶었었다.

야구장은 잘 있는지 말이다.


대전역 건너편에서 보문산공원을 가는 버스는

친정 엄마가 사셨던 대흥동을 지나고

(대흥국민학교 출신이셨던 듯 기억된다.)

성심당 본점을 지나고

(아침부터 줄을 많이 섰더라. 본점은 처음 지나가봤다.)

두 곳의 야구장을 지나서

나를 아직은 꽃소식은 없는 보문산공원에 데려다 주었고

나는 오르막 산책길을 즐기면서 큰 호흡을 하면서

새로 만든 전망대까지 돌아보는걸로

오늘의 운동과 만보 걷기를 완수한다.

남편에 대한 화나고 서운한 감정은 아직 남았고

발부상 부위는 아직 뻐근하지만 말이다.

그리고는 <불꽃야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파이터즈파크를 눈에 담고 사진을 여러장 찍어

나와 같은 덕후들에게 사진을 전송한다.

답톡이 올라온다.

성지순례 가셨군요.

맞다. 난 오늘 성지순례 온거다.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의 남편이 쏘아올린 생각지도 못한 성지순례 길이다.


점심은 대전 핫플 백화점에서

서울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도저히 못먹는

인기 식당의 분짜를 시켜서 폭풍흡입하고

새로 나올 봄시즌 샬랄라 옷들의 취향을 파악하고는

출발시간보다 한시간쯤 일찍 대전역에 도착했는데

더 일찍 가는 티켓으로 바꾸려니 모두 매진이다.

입석도 없단다.

명절 기차역이 분명하다.

어제는 분명 꽤 있었는데 역에서 현장구매를 꿈꾸고 왔다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할 수 없다. 예약해 둔 기차를 기다릴수밖에.

물론 연착이란다.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져가서(사진을 너무 많이 찍고 사방에 보냈다.)

편의점에서 C타입 충전기를 하나 사고(휴대용이 필요하긴 했다.)

옆을 돌아보니 코드가 드러나있는 핫도그집의

빈 좌석이 보인다.

커피만 가지고 충전을 하면서 이 글을 쓴다.

커피맛이 꽤 괜찮다.

성심당빵은 물론 역에 도착하자마자 샀다.

이번에는 튀김소보로만 있는 세트와

내가 오늘 다녀온 보문산 메아리와

남편용 마들렌이다.

튀김소보로는 딱 두개만 먹고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수요일에 내려오는 막내동생 부부를 줄 예정이다.

남편에게는 절대 주지 않겠다.

어제 말다툼에 대한 내 방식대로의 소심한 복수이다.

받아랏.


(보문산 왕벚꽃이 그리 특색있게 멋지다 하더라. 초입에 두부두루치기 맛집도 알아두었다.

남편이 또 말싸움을 걸어오더라도 꿀릴게 하나도 없다. 보문산 산책하면 된다. 아니다. 다음엔 계룡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