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원의 다소 이른 밤

이제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는 않은

by 태생적 오지라퍼

동료와 함께 학식을 먹고

그 간의 커리큘럼관련 이야기를 나누고는

두근 반 세근 반 학생들을 기다렸다.

출석 시스템도 완벽하게 처리한(이런 적은 처음이다.) 새 얼굴들이 나를 기다려 주었고

그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과학도 역사도 과학자들도 다들 어렵고 딱딱하고 관심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교과제목인데 말이다.

내년에는 기필코 교과명을 바꿔보리라 생각한다.

계획대로 완벽한 강의는 아니었지만

개별 활동도 하고 조별 활동도 하고

발표와 이야기 나누기도 했으니

내 수업 포맷을 조금은 맛보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는 처음 본 나에게 자신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선뜻 들려준 멋진 학생이 있었서 기분이 최고이다.

나와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선뜻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창 공부를 잘하다가 우울증이 와서

3년간 방에서 게임만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하고 대학에 들어왔다는

그래서 자신이 했던 그 게임보다 더 멋지고 의미가 있는 게임을 만들어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나는 과학과 연관된 멋진 게임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침에는 서울에서 대학교까지

강의가 끝나고서는 대학교에서 조치원 집까지

내 생애 가장 오래 운전을 한 날로 기록해야 두어야 마땅하다.

그래도 12월에 몇 번을 왕복해서 힘들이지 않고

옆을 쌩쌩 달리는 화물차에 기죽지 않고

깐밤과 초콜릿을 간식삼아

고양이 설이가 기다리는 집에 잘 도착했다.

그 사이에 학교에서 정리한 짐도 내리고

조치원의 저물어가는 해도 사진 찍고

(오늘 대문 사진은 모두 달과 태양 사진으로 도배했다.)

냉동실의 오징어와 소고기를 꺼내 해동시키고

(오징어 무국 끓여두고 소고기 구워서 상추쌈 싸서 먹겠다.)

동생은 저녁 회식이라 늦는다 하고

남편은 항암 주사를 다 맞고 친구 오피스텔에서 쉬고 내일 내려온다하니

나는 고양이 설이와 밀린 애정 행각을 조금 더 벌이다가

기대는 하지 않지만 야구를 보는 것으로

장거리 여행을 한 오늘 하루를 마감하려 한다.

이제 조치원은 나에게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는 않은 도시이다.

쉽지만은 않은 하루였지만 보람차다.

나는 강의를 해야 살아있음을 느낀다.

무슨 이런 희한한 종족이 다 있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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