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은 아직도 못만났다만
No. 1
이곳에서 머리 드라이를 하러 단지 바로 앞 미용실을 가봤는데
나와 동갑인 원장님이 거의 재야의 철학자 수준이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잘난 사람이나 늙으면 다 소용없다.
건강하고 걱정 없으면 최고이다.
나는 잘난 사위나 며느리를 기대한 적이 없다.
힘들기만 할 뿐이다.
일이 있어서 밥 먹을거 걱정만 안하면 된다.
드라이를 하는 그 시간동안 쏟아내는 에피소드와 철학적인 묘사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다 올 뿐.
무엇보다도 제일 부러운 점은 원장님 아들이
얼마전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뱃속에 손주 녀석도 함께 말이다.
나는 드라이하는 내내 부러움에 몸을 떨다가 왔다.
No. 2
골프 연습장 가장 끝 타석의 홀인원 아저씨는
무림의 골프 고수님이신가보다.
듣기로는 2월에만 홀인원을 3번이나 했다는데
아무리 스크린 골프이지만 가능한 일인가 싶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너무 시끄럽다는 점이다.
타구 하나를 치고 분석이 너무 많고 혼잣말인데도
전체 골프 연습장에 다 들린다.
목청이 엄청 우렁차다.
물론 잘 쳤다고 자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못쳤다고 욕 비슷한 것을 하는 경우도 있고
조치원에 내려와서 내가 만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물론 체구도 헤비급이다.
그리고는 꼭 나에게 한 마디를 한다.
<아주머니가 연습을 나오면 공이 잘 맞네요.>
어쩌라는 말인가? 나보고 계속 나오라는 이야기인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다만.
N0. 3 과 No. 4
단지 앞 하나뿐인 마트 사장님은 진중하다.
A4 복사지와 순간접착제를 물어보는 어수룩한 나에게
문구가 놓여있는 슈퍼의 비밀 공간을 알려주고
단감이 너무 딱딱하다고 두 차례나 바꾸어주었다.
나는 딱딱한 감도 그냥 저냥 괜찮은데 말이다.
단지 앞 편의점 여자 사장님은 친절하다.
들어서기만 하면 무엇을 찾는지 꼭 물어본다.
대부분 편의점 사장님은 손님이 알아서 무언가를 찾아오면 계산만 해준다고 생각하던
나의 편견을 완전히 깨주었다.
그리고 특히 1+1 제품과 할인 제품을 샅샅이 알려준다.
차가운 구운 계란을 전자렌지에 잠깐 데우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실험도 해주고(금방 따뜻해지기는 하더라. 잘못하면 터질 수도 있겠다.)
자동차 열쇠 안에 들어가는 원형 건전지의 기종을 친절하게 찾아주기도 했다.
아직까지 조치원에 내려와서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든 사람은 없다.
서울에서는 종종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특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해대는 부동산 여자와는
큰 소리로 싸우기도 했었다.
까탈스런 집주인에게도 화가 났었다.
이곳은 다들 친절하고 여유 있어 보인다.
충청도 특유의 기질이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만 총총대고 다닐 뿐 주위는 매우 안정적이다.
이상 조치원 생활 석달 차에 접어든 나의 일기이다.
(그런데 매화꽃을 못봐서 섭섭하기는 하다.
누가 매화꽃이 핀 곳을 알려주면 참 좋겠다.
사진은 후배가 광교에서 찍은 사진이다.
광교면 분명 조치원보다 북쪽인데 도대체
조치원에는 매화꽃이 어디 숨어 있단 말인가?
도통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