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그 무거운 짐의 무게

측정 불가능한 값

by 태생적 오지라퍼

푸짐한 점심을 먹고 막내 동생이 옛날 고리고리적 사진을 가져오면서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라 했다.

엄마가 딸들과 함께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마도 내 가방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국민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즈음이었던 것 같다.

웬일로 나는 치마를 짧은 치마를 입고 흰 양말에 세상에나 꽃무늬가 커다랗게 박혀있는 신발을 신고 있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닐게다. 정녕코.

내 취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치마와 꽃무늬와는

결이 맞지 않는다.

내가 1학년 여덟살이면 혹은 2학년 아홉 살이면

일곱 살 차이가 나는 막내가 두 돌이 채 안되었거나

그 즈음인 것 같고 그래서 엄마가 안고 있다.

아직은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사진이고 흑백사진이라 명료하고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만.

지금은 아파서 누워만 있는 동생의 앙증맞은 얼굴이 귀엽기만 하다.

이 고만 고만한 딸들을 케어하랴 엄마는 많이도 지쳤을 것이지만 그래도 환하게 웃고 계신다.

엄마의 웃는 모습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 기억으로는.


낮잠을 자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그 사진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려보기로 했다.

엄마의 갸름한 얼굴에 포인트를 두려다가 얼굴이 너무 빼쪽해졌다.

우리는 얼굴이 아버지를 닮아 다 크고 동그란데

엄마는 갸름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내 실력으로는 그 미모가 표현이 안된다.

우리 집 마당에는 채송화와 봉숭아꽃이 많았는데

그래서 채송화는 잘 빻아서 소꿉놀이에 반찬을 했었고

봉숭아는 여름이 지나갈때쯤 엄마가 물을 들여주곤 했었는데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봉숭아 물들이기를 좋아라 하지 않아서

한 두 번 했었던 것 같고(오래 비닐을 묶고 있어 피가 안통하는 그 느낌이 싫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고(심지어 결혼식때도)

손톱을 기르지도 않았고

(오히려 한동안 마구 불안할때면 물어뜯었었다.)

젤을 붙인다던가 손톱 정리를 하러 다니지도 않았었으니

내 손톱에 무언가가 더해진 적은 그 봉숭아물 들인

그 짧았던 시간 빼놓고는 없었다.

사진을 찍은 그 날은 몹시 더운 날이었을게다.

화단 뒤로 삐쩍 마른 식물들이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서있다.


사진 속의 그 집을 지난 주 수요일 한번 다녀와보려고 했었다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녁 약속을 그 집을 보고 화곡역에서 잡으려다가(만나려는 사람이 화곡역 근처에 살았다.)

오목교역으로 변경하고 만나는 사람을 한 명 더 추가했었다.

제일 마음이 아팠던 학교에서 나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주었던 지인들이어서

늦게나마 고마움의 식사 한 끼를 대접했다.

화곡역에 내려 그 집을 가보면 추억이 너무도 많이 떠올라서 그리고 부모님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마음이 너무 먹먹하고 아플 것 같아서 포기했던 거다.

내가 기억하는 집 주소 중 첫 번째.

그리고 아마도 나의 고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그 곳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렵게 매매를 했었다.

지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도 했고

그림을 보고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형제 중 한 명과 사이가 너무 틀어져서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 젊은 시절 엄마가 느꼈을 자식이라는 무거운 짐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나는 달랑 아들 녀석 한 명인데도 이리 마음 아프고 저리고 힘이 들고 있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라는 위치가 이렇게 마음 아프고 힘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그리 시집을 가라고 내 등을 떠민 것이었을까?

(그러는 나도 아들 녀석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를 희망하고 있긴 하다만)

혼자 살았으면 조금은 더 폼나게 나답게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오늘은 춘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오늘을 기점으로 이제 낮의 길이가 더 길어질 것인데

나는 오늘 하루만은 엄마 생각에 푹 잠겨 있어보려 한다.

친한 후배가 부모님과의 사진으로 카톡 대문 사진을 변경했는데

2년 전 사진이라면서 2년 후에 이렇게 아프시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마음 아프다고 한다.

나도 그러하다.

2020년 3월 그리고 2022년 1월.

오랜 투병 끝에 엄마와 아버지를 보냈으나

아직도 마음 속에서는 두 분을 다 보내드리지는 못했나보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노란 프리지아를 샀다고 SNS에 올렸더니

우리 엄마도 참 좋아하셨는데 돌아가신지 30년이 되어도 그립다는 답글이 달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게다.

엄마라는 그 무거운 짐의 무게.

절대 측정 불가능한 값.

이제는 내려놓으셨을라나 모르겠다.

그 곳에서도 여전히 지켜보고 계신다면

아픈 동생에게 기적처럼 힘을 주시거나

아니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데리고 가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주 조금만 울고 보내줄텐데 말이다.

엄마 옆자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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