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103
마지막 시험 문항을 출제하며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일찍일찍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니 아마 그렇게 태어났을 것이다.
오늘 다음 주부터 닥쳐올 커다란 변화에 대비하여 아들녀석과 나름의 준비를 했다.
물론 각자 방 정리 수준이지만 말이다.
아들 녀석의 숨겨진 드레스룸에서는 거의 50여벌의 옷들이 나와서
일부는 지난번처럼 의료 수거 플랫폼에 기증할 예정으로 박스 포장을 해두었고
일부는 우리학교 축제때 플리마켓용으로 남겨두었고(대부분 축구 관련 옷들이다.)
일부는 통크게 지 아빠에게 주겠다고 정리해두었다.
그사이에 아빠 줄 것 없냐고 물어보았을때마다 없다고 딱 잡아떼더니 말이다.
내 속이 다 후련하다.
그리고는 나는 내 생애 마지막 시험 문제를 출제 중이다.
시험문항에서도 그저그런 문제말고 창의적이며 학생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문제 형태를
그리고 나의 다소 반짝이는 머리를 자랑하고픈 마음은 초임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젊디 젊었던 날 이런 문항을 냈었다.(지금은 창피하기만 하다)
<우리학교 이쁜 과학 선생님의 생일은 11월 5일이다.
이날 태양은 황도상의 어느 지점을 지나가고 있을까?
그리고 그때 한밤중 남쪽하늘에서 보이는 별자리는 무엇일까? 물론 황도 12궁 그림은 제시했다.>
시험 문제 이상여부를 확인하러 방문한 학급에서 아이들은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절대 비웃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기억하기에도...)
<선생님 문제가 이상해요. 우리학교에는 이쁜 과학 선생님이 없어요. ㅋㅋ>
올해 시험 범위에 이 내용이 포함되지만 나는 이제는 절대 이런 문항을 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나이가 많고 더할나위없이 근엄해졌다. 학교 최고령 교사니 말이다.
마지막 시험 문항이기에 더욱 더 한치의 오류도 없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용만(나는 중요 내용 말고 짜투리 내용을 내는 교사를 질색한다.)
그리고 그 과학 내용이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를 꼭 집어서 유쾌하게 물어보려 한다.
그러기위한 나의 노력은 교과서를 꼼꼼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잘보기를 희망하는 학생이라면
교과서를 구석구석 그림하나 글씨하나 놓치지 말고 읽는 것이 최선이다.
아마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이런 방법으로 시험 문항을 출제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학교는 이번 학기 공사 관계로 학사일정이 다른 학교와 다르지만(1월 구정 전까지 학교에 나와야 한다.)
내가 시도한 학사일정 중 가장 뿌듯한 것 한가지를 고르라면(교무부장이었으니 학사일정 짜는것이 내 몫의 업무였다.)
1월에 졸업식까지 마무리하고 2월은 오롯이 신학년 대비에만 힘쓸 수 있게 작은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학교에서도 공사 기간 확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전부터 2월에 3~4일 학교에 다시나가서 어영부영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영화만 보여준다. 대부분)
졸업식과 종업식만 하고 오는 그 시스템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 날들 때문에 2월에 여행 계획 잡기도 애매하고 장거리 여행은 더더욱 불가능하고 모든 것이 힘들다.
학생이나 교사나 마찬가지이다.
학생은 물론 체험학습을 쓸 수는 있겠지만
일생에 한번인 중학교 졸업식을 건너뛰는 것은 마음이 조금 그럴테니 말이다.
가득이나 짧게 느껴지는 2월에 며칠 학교 나오고 나면 나머지 날들도 흐지브지 지나가기 마련이다.
교사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2월말에는 신학년 대비로 해야할 일들이 있으니 2월 마지막주는 거의 방학이 아니고 출근일이나 다름없다.
나는 2월 말고 1월에 모든 일을 끝내고 종업식과 졸업식을 하는 시스템이 어떻냐고 제안했었다.
이미 10년전에 말이다. 많이 앞서나가기는 했었다.
처음에는 익숙한 방법이 아니라 우려도 많았고
교육청의 중요 공문을 놓친다면 걱정도 했으나
(이제 집에서도 공문을 볼 수 있다. 물론 코로나19가 시스템 변화에 한 몫을 했지만 말이다.)
이제 중구 관내의 학교들에게는 이 방법이 정착된 것 같아 뿌듯하다.
물론 다른 교육청 소속의 학교들은 아직도 이전 방법을 쓰는 곳들이 더 많다.
원래 변화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리고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불러 올수도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지만
사소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그것이 모여서 발전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은 2025년 1월 24일이면 마무리된다.
그 이후의 2월은 나에게는 마지막 겨울방학이며
마침내 3월이 되면 많이 이상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교사가 아닌 삶을 살게 된다.
당장 이번 주에 닥칠 일도 예상되지 않는데 그때를 미리 걱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사실 많이 걱정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조금뿐임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시험 문항의 높은 퀄리티 확보에나 힘써봐야겠다.
날이 꽤 추워지는 것 같다. 마음이 추워서일수도 있지만...
(배경 사진은 금요일 나와 마지막 특강수업을 한 학생이 돈가스 먹고 집에 가는길에 찍어서 보내준것이다. 초승달이 이쁘기도 하다. 달의 위상도 이번 기말고사 범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