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사소한 일들
모든 분노는 나에게서 나온다.
다른 날과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부지런하게 눈도 쓸고 거리 쓰레기도 정리하는 자그마한 건물 관리인 할아버지도 여전했고
그 앞의 자동차 영업소 내부를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변함없는 그저 그런 날 아침이었다.
추워지고 나서는 지하철역까지 걷는 길에 매일 스쳐지나가던 분들 중
딸과 함께 운동하는 보행기 할머니와
호두 까먹으면서 걸어 다니시는 할아버지를 볼 수 없었던 것만 빼고는 똑같았다.
올해 첫 레깅스 내복을 입었더니 추위도 버틸만했고
지하철 엉뜨가 작동되지않은것 빼고는 똑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점심이 되면서 조금씩 분노가 차오르는 일이 생겼다.
첫 번째는 문자 한 통이었다.
얼마 전 제출한 서류에 오류가 있으니 다시 수정해서 제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럴리가 없는데 하고 찾아보니 정말로 누락된 내용이 있었다.
3년째 했던 일인데 해당 학생 6명을 모두 다 기록해야 하는 것을 대표 학생 2명만 작성한 채로 보냈던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을 놓치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함께 분노게이지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내일 시간표가 요일 변경인지 아닌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먼저 요일 변경을 했는데 한참전에 만들어진 학사달력에는 수정 사항이 채 반영되지 않아서 혼돈을 가져온 것이다.
늙어가면서 놓치는 것이 생긴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 현상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사소한 것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그 실망감과 분노를 참기는 힘들다.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정말 슬프고 아팠다.
그래도 아직까지 강의를 하는데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애써 추스려보았다.
다음으로는 이번 주 내시경 검사를 위하여 음식 조절을 해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했다.
목요일 건강검진을 위한 공가를 신청했으니 월, 화, 금요일에 목요일 수업을 모두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루 5시간의 수업을 뛰어야만 하는데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다니 기운이 없고 아쉽다못해서 분노가 생겼다.
흰 밥만 먹으라했는데 오늘따라 잡곡이 많이 섞여있는 밥이다.
김치도 안된다 했는데 오늘따라 김치가 엄청 맛나보인다.
생선구이는 괜찮은데 나는 식어버린 생선구이를 별로 좋아라 하지 않고
씨가 있는 과일도 피하라했는데 하필이면 키위였고(씨를 빼고 나니 별로 먹을게 없었다.)
닭개장은 많이 매웠다.
배가 고파서 분노가 생기는 경험은 이전에도 종종 했었다.(사람이 참 원시적이다. 본능적이다.)
다행히 누군가가 나누어준 두 알의 호두과자로 배를 채웠다. 참으로 고마웠다.
마지막 분노의 정점은 일주일 전 예약한 로봇 청소기 AS 에서였다.
로봇청소기가 두 대이다. 하나는 건조한 상태에서 청소를 하고 하나는 물걸레 청소기이다.
고장이 나서 충전이 되지 않는 것은 물걸레 청소기인데
일주일 전 방문 AS 신청 설문 응답에서 어느 것이 물걸레 청소기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 종류의 모델명이 청소기에는 아주 작게 붙어있어서 무엇인지 보이지도 않고
사진을 찍어 확대해보았으나(노안이다. 분명히... 화가 많이 난다.)
길고 긴 모델명만 있을 뿐 R9가 건조인지 물걸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직관적이지 않은 설문을 절대적으로 싫어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 싫어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 싶어서 오늘 AS 나오는 직원과 통화했을 때 미리 물어보기까지 했다.
내가 AS신청한 것이 물걸레 청소기가 맞느냐고...
그때는 맞다하더니
막상 오늘에 와서는 건조 청소기였다면서
다른 배터리를 가지고 왔다한다.
분노 게이지의 대폭발이다.
다행히 나의 분노를 가라앉혀줄 아들 녀석의 째려보는 눈길이 있다.(제일 무섭다)
그리고 더 다행하게도 배터리를 금방 가지고 올 수가 있단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거의 매일 돌리는 건조 청소기는 말짱하고
일주일에 1~2회 돌리는 물걸레 청소기의 배터리가 고장났다는 점이다.
AS 기사님 말 한마디로 정리는 되었다.
자주 안쓰고 충전만 하면 배터리에 무리가 갈 수 있다고. 오히려 부담이 된다고.
오래 주차해둔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는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렇다. 기계는 자주 써야했다. 내가 너무도 물걸레 청소기를 아꼈었나보다.
건조 청소기는 출근하면서 돌리고 갔는데
물걸레 청소기는 물도 뿌려주어야 하고
혹시 고양이 털이 끼이기라도 할까봐 내가 집에 있는 동안에만 돌렸었다.
건조 청소기는 소리도 꽤 나는데 물걸레는 소리도 별로 나지 않아서 그 쓰임을 놓쳤었던게다.
자신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발자국을 지워주는 자신의 존재감을 꼭 알려주고 싶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노가 조금은 사그러 들었지만
대기업의 AS 설문의 모자란 직관성에는 아직도 화가 조금은 남아있다.
이럴때는 나의 최애 <최강야구> 돌려보기가 최고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대학전쟁>이라는 또 다른 관심가는 프로그램을 오랜만에 찾았다.
작년에 1편을 봤었는데 멋진 대학생들의 두뇌싸움이 박진감 넘쳤었다.
물론 빠른 계산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두뇌 경쟁에 빠른 계산 능력보다는 통찰력과 분석 및 직관력이 더 우대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학영재교육 전문가 관점에서는 그렇다.
오늘 알게 된 확실한 점은 늙을수록 분노 게이지가 쉽게 점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불씨는 사소한 것이라는 점이다.
예전에 내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어르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나를 또 분노하게 한다.
결국 모든 분노는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이들어서 굳센 신앙의 힘이 그래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