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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정체성 찾기

마지막 정리 작업은 끝이 없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은 나의 마지막 겨울방학 3일차이고

구정연휴를 맞이하여 긴급 결정된 임시공휴일이기도 하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연휴인지, 방학인지, 퇴직인지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일은 기억을 하고 있다.

남편이 세 번째 항암주사 맞는 날이다.

이제는 그 날의 시스템을 조금은 알겠다.

아침 8시까지 금식 상태로 병원에 가서 채혈을 한다.

10시에 채혈 결과를 바탕으로 주치의를 잠깐 만난다.

채혈 결과에 이상이 없고 열이 나거나 혈압등에 이상이 없으면

12시쯤부터 천천이 5시간정도 걸려서 항암 주사를 맞는다.

남편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지하철을 타고 운동삼아 그 길을 나섰고

혈액 검사에 이상이 없어서 주사를 맞는다고 톡이 왔고

오늘은 일정이 더 늦어져서 저녁 7시쯤 집에 올 것 같다고 했고

눈과 바람 때문에 도로 사정이 나쁘니 절대 픽업을 오지말라고도 했다.

어쩌겠나.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브런치 약속이 있었다.

1월 6일 약속이었는데 나의 A형 독감 이슈로 미루어진 것이다.

항상 나를 지지해주는 멋진 후배들과의 점심이다.

정년퇴직과 남편 항암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나를 위로해줄겸

만든 자리라는 것은 이야기를 안해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꾸리꾸리해서 조금은 늦장을 피다가 생전 해본 적 없는 약속시간에 10분쯤 늦었다.

이런 일은 내 생애 몇 번 되지 않는다.

톡을 보내 음식 주문을 미리하고 딱 나올때쯤에 맞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즐겁고 위안이 되는 식사를 마치고

(나는 회덮밥인데 야채와 회를 잘 못 먹고

후배 한명은 고기를 잘 못먹고

다른 후배 한명은 커피 수혈이 매우 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커피와 디저트 케잌까지 맛나게 얻어먹고 게다가 은은한 향수까지 선물을 받았으니 행복한 점심이었다.

고맙기만하다. 좋은 후배들이다.


점심 후에는 오늘의 제일 중요한 미션이라고 할 수 있는

포상관련 자료 정리와 연말정산과 퇴직수당신청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학교에 나갔다.

충무로역에서 학교까지 걷는 그 길을 또 잊어버리지않게 눈에 담으면서 말이다.

눈 내리고 비어있는 학교는 참으로 고즈넉하다.

당직기사님과 사전 약속이 된 나를 도와줄 행정실 실무사님과 그리고 나. 그 큰 학교에 딱 3명이 있었다.


먼저 3년간 본교에서 학생들과 진행한 다양한 생태전환과 기후변화 활동을 정리한 파일을 최종 점검하고

스캔해서 <2025 대한민국 녹색기후상> 교육부분 단체상 담당자에게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나의 여러 가지 활동 중 큰 한 가지 맥락을 정리해본 것이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수상 학교가 된다면 2월말에

2023 생태 UCC 대상 수상자 4명과

2024 환경골든벨 대상 수상자 및 참가자 7명

그리고 교장 선생님과 국회에 가서 상을 수상하게 된다.

내가 희망하는 가장 멋진 마무리이다.


두 번째로는 연말정산 서류를 제대로 정리했는지 점검을 받았다.

내가 국세청 자료를 업로드해도 행정실 담당자가 검토한 후 이상한 점이 있으면

문의가 오고 정정을 하고 해야하는데

오늘 마침 그 분께서 나와서 근무를 한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자세한 내용을 검토하고 이상여부 및 근거자료 출력까지 마치고 났더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아마 내생애 마지막 연말정산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내년에도 2개월은 근무를 했으니 해야하나? 그것은 확인해봐야겠다.

그리고는 퇴직수당 신청을 했다.

매뉴얼이 하라는대로 처리했고 제대로 했는지 검토까지 받았으니

그리고 이상이 있으면 연휴가 끝나고 확인 전화가 올 것이라 생각하니 이것도 마음이 편하다.

내친김에 퇴직예정증명서도 몇 장 출력해두었다.


그리고는 1년간 나의 일정을 빼곡하게 기록해두었던 탁상 달력을 미련없이 버리고

책상위의 내 명찰과 그 옆에 꽃병 하나를 놓고 기념사진을 찍고

궁금증이 풀린 빨간 장미 바구니와 내 애착 신발 실내화를 들고 교무실을 나섰다.

이제 공식적인 것은 대충 마무리 된 것 같다.

남은 것은 국가 표창이 오면 받으러 오는 일

2학년 부장이 결정되면 인계 인수를 해주러 오는 일

새로 오는 후임 과학교사에게 수업 관련 안내를 해주는 일

그리고 2월에 있는 마지막 교사연수를 ZOOM 으로 진행하는 일 등이 남아있지만

연수를 빼고는 필수가 아니다. 나의 선택이다. 연수도 집에서도 할 수 있긴 하다.(고양이 설이가 자꾸 화면을 가릴까봐 조용한 학교로 갈까하는것이다.)

에코스쿨 구성 관련 출장이 두어번 있을 수 있겠다.

나의 2월은 이렇게 다양한 밥 약속과 선택적 학교 방문과 마무리 일정으로 매우 바쁠 예정이다.

이정도 스케쥴이면 퇴직 우울증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작 걱정되는 것은 3월이지만 말이다.

연휴인지, 방학인지가 애매모호한 오늘도 잘 살았다.

아참. 월요일인 오늘 나의 최애 <최강야구> 본방 사수가 남았다.

남편을 위한 저녁상 차림도 남아있다.

맑은 설렁탕과 전복죽을 해두었는데 어느것을 선택할지는 모르겠다.

눈과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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