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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22

조금은 특별한 어젯밤 이야기

by 태생적 오지라퍼

나에게 밤이란 시간은 거의 없는 시간이다.

초저녁 잠이 워낙 많기도 하고(9시 뉴스 하는 시간부터 졸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였다. 그때의 꿀잠이 내 수면 질 확보에 80%를 차지한다.)

딱히 밤에 하는 무언가에 대한 효과도 느끼지 못하고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술 맛을 몰라서 일수도 있다. 평생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실험실에서 에탄올 냄새를 너무 많았나보다.)

따라서 업무 처리도 일찍 일어나서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고(그래서 초과근무가 일상인 장학사가 안맞는다.)

밤샘 공부란 해본 기억이 한 두 번인데 그것도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고

컨디션으로 볼 때 새벽 골프는 쳐도 야간 골프는 치기 힘들었으며(지금은 둘 다 너무 힘들다.)

육아 시기 밤 수유는 지금 생각해도 초인적인 힘이었던 것 같다. 다시하라면 못할 것 같다.


어젯밤은 본의아니게 나의 패턴이 바뀐 날이었다.

방학이기도 했고 휴일이기도 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남편의 항암 투약 시간이 너무도 길어졌다는 것이 주 원인이다.

거의 저녁 8시 반이 되어서야 투약이 끝났다고 한다.

왜 그런지 들어보니 투약 담당 간호사들의 성향에 따라 주사약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씩은 달라지는데 어제는 최대한으로 속도를 늦춘 모양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겠다.

나도 갑상선암 수술 후 너무도 기력이 없어서

동네 병원에서 수액을 맞는데

수액 방울 떨어지는 속도가 몸 컨디션을 못쫓아가니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던 기억이 있다.

수액을 맞고 컨디션이 더 급속도로 나빠졌다.

또 상태가 안좋은데 아로마 마사지를 받다가

그 향때문에 어지럼증을 느낀적도 있었다.

이곳저곳 많이 아파본 나는 남편의 아픔을 십분 이해하고(전부다는 아닐 것이다.)

의료계 진출을 희망했던 나는 의료진의 행동에도 이해의 폭이 넓은 편이다.

신촌에서 8시 반에 투약이 끌났으니 집에 오면 9시 반이 넘는다.

택시를 타고오라 신신당부하였으나

택시타는 곳에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면서

지하철을 꿋꿋하게 타고 온 남편의 의지를 칭찬해야하는 것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뭐라 뭐라 잔소리할까봐 아예 본인이 먼저 힘들어하는 티를 낸다.

옛날이라면 이런 것으로 투닥거리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환자 본인이 제일 힘들고 외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재빨리 저녁을 차려주었다.

설렁탕에 파를 듬뿍 넣고(고기를 싫어한다. 컨디션이 나쁘면 고기 냄새도 역겨워지는 법이지만 단백질 보충이 필요하다.)

동치미, 배추김치, 깍두기를 준비하고

감자와 호박고구마 채쳐서 부드럽게 볶은 것을 준비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먹은 된장베이스의 꽃게탕 국물을 찾는다.

그게 뱃속이 더 깔끔해질지 모른다.

이럴 줄 알고 1/2인분 남겨둔 국물을 재빨리 뎁혀주었다.

어제 저녁에 먹은 열무김치를 찾는다.

그건 옆 식당김치인데 그리고 그 식당은 명절 휴일인데 말이다. 국물의 시큼함이 필요한 모양이다.

배가 입덧하는 것처럼 요동치고 있나보다.

그 힘든 상황을 조금은 알겠다.

그래도 힘을 내야하니 꽃게탕에 밥 한 숟가락 말고 설렁탕에 밥 한 숟가락을 말아서 억지로 먹는다.

나보다 훨씬 의지력이 높다. 다행이다.

나였으면 못먹었을 것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처음으로 남편, 아들 녀석과 함께 나의 최애 <최강야구> 본방을 함께 보았다.

밤이 없는 내 스타일에 늦은 시간에 하는 <최강야구>는 늘 궁금하지만 볼 수 없는 그런 대상이었다.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하이라이트를 유투브로 보거나 다음날 퇴근해서 돌려보기를 하던가 했었다.

어제는 덕아웃 파이팅이 넘치는 대학팀과의 오랜만에 편안한 경기를

남편, 아들과 함께 보면서 야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순간은 특별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물론 게임을 이겨서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다음 주는 내가 직관하러 갔던 잠실 경기가 나온다.

열심히 눈떼지 않고 보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빼고 다른 기억은 희미하다.

추운 날씨라 꽁꽁 싸매고 갔지만 해가 드는 쪽이어서 버틸만했었고

너무 잘하려다가 실수하는 장면에는 함께 애가 탔었고

모두가 진심인 스포츠의 특성에 다시 한번 가슴 뭉클했었고

열심히 준비한 제작진의 성의가 보여서(그런 것은 꼭 보인다.) 즐거웠었다.

사는 것도 그렇다.

중요한 장면 몇 가지만 뚜렷하게 각인될 뿐 나머지는 점점 흐릿해진다.

그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의 항암으로 인해서 가족 모두가

가슴 한 켠에는 걱정이 자리잡고 있지만

담담하게 잘 이겨내고 있음에

그래서 어제와 같은 특별한 저녁도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아침은 전복죽 혹은 감자 스프이다.

어느 것이 입에 맞을지는 먹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전복죽이 선택을 받았고

어제 그 된장베이스꽃게탕을 또 찾았고

망고와 사과,우유 갈아서 한 잔씩 먹었다.

선택받지못한 감자수프는 내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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