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 여행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만...
역사적인 퇴직 첫날(공식적으로는 3월 1일이지만 휴일이므로)
거창한 외국 한 달 살기는 못가더라도 어딘가 가고는 싶었다.
그냥 집에 있으면 많이 슬퍼지고 우울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애매한 시간에 집을 나서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봐도 출근하는 직장인도 봐도
마음이 심난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침 일찍 출발하는 제주행이다.
퇴직 후 첫 여행이라는 타이틀은 멋진데
사실 다른 대안도 딱히 없었다.
미래학교에 근무했을 때 다른 학교에는 없는 업무가 많이 있었지만(너무 많았다.)
그 중 한 가지가 특수분야 교사연수를 지정받아 진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안한다고 회피하면 안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런 기회가 또 어디있겠나 재밌고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가 평소 내 스타일이니
덥석 연수 메이킹 기회를 받았었다.
젊은 선생님들은 2015년 당시 새롭기만 한
태블릿 사용법, 오피스365 사용법, 공유 문서와 설문 만들기 등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기기 활용 연수를 운영했는데
나는 이것과는 차별화된 연수를 하고 싶었다.
그런 연수는 그들이 전문가이고 그들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늘 그 마음이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어야 다른 사람도 하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기반이었다.
첫 해에는 과학교사 대상의 실험 연수를 운영했었던 것 같다.
센서를 사용하거나 토의 토론을 하거나
실시간 데이터를 쓰거나 하는 수업방법 개선에 초점을 맞춘 연수였다.
그런데 두 번째 부터는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꼭 과학교사만 듣는 연수를 해야 하는 것일까?(처음에는 소문이 나지 않아 연수생 모집도 힘들었었다. 연수생을 구걸했었다.)
과학은 교양이라면서 왜 연수는 과학교사로만 한정하고 과학수업으로만 제한지어서 운영하는 것일까?
너무 그들만의 리그인것 아닌가?
그래서는 과학의 필요성을 확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희망하는 사람 모두가 관심 있다면 들을 수 있는 연수를 운영하는 것이 새로운 발상 아닐까?
융합의 시대에 말이다. 역시 나는 조금은 엉뚱하다.
그런 관점으로 생각을 바꾸고 나니
전공과목을 모두 아우를 수있으면서
과학적인 내용을 같이 접목할 수 있는
자연이나 생태나 환경이라는 큰 카테고리가 세워졌고
평소에 나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이번 연수를 통해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연수는 물론 놀러간다는 우려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적절하게 공부할 미션을 부여하면서 역량도 높이면서 갈 수 있는 곳들을 찾아보았다.
이런 스타일의 연수 첫 번째로는
가볍게 당일로 대전을 방문했다.
대전에는 국립과학관이 있고
그 당시 친구가 있었던 천연기념물센터가 있었고
그 주위에 지질박물관과 수목원도 대덕 연구단지도 있었다.
기차타고 하루 코스로 공부와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물론 마무리는 성심당빵이었지만...
첫 번째의 성공을 발판삼아
두 번째는 더 먼 곳의 1박 2일 연수를 기획했다.
부산이었던 것 같다. 순서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침 부산 모 대학교에 친한 후배 남편이 교수여서
방문자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 편의를 제공해주었고
해양학 연구 관련 특강도 대학 강의실에서 열어주었고
항해선에 올라가보는 멋진 학교 투어도 해주었다.
역시 지인 찬스는 꿀이다.
부산 왕복 KTX 티켓을 단체 구입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나
해양과학관 앞의 바다와 이기대 지질 투어까지 하는 야무진 연수였다.
다음으로는 여수와 완도쪽 지질답사였다.
(전라도 쪽을 한 번 더 갔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생각났다. 변산반도쪽 갔었다.)
나도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으나
그 분야 최고의 강사님을 알고 있으니 그 분의 계획대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 분께 감사의 식사를 대접해야겠다.
남들이 안가는 진도 대교 아래에서 지질답사를 하고
가랑비오는 완도수목원에서 남쪽의 꽃들을 보고(엄청 좋았다. 꼭 가보시라.)
열심히 찾아본 멋진 숙소에서의 일출을 본 그 때의 행복은 오래토록 회자되었었다.
자신감이 충만한 나는 다음해 봄과 가을 제주 연수를 기획한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 했을까 싶다.
연수생들은 비행기표만 내돈내산을 하면 된다.
이제는 소문이 엄청 나서 연수 신청 1분만에 연수 신청자가 넘쳐난다.
어느 분을 모셔야 하나 걱정할 정도이다.
다른 연수에서는 그럴 경우 경력 우대인데
나는 파격적으로 투트랙을 사용했다.
이렇게 연수를 진행하면 젊은 선생님들은 좋은 연수 기회가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제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날씨가 변수인데
주말 1박 2일 연수를 마치고
다음 날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하므로
날씨 요정님에게 정말 많은 기도를 했었다. 다행이었다.
한번은 동쪽으로 한번은 서쪽으로 지질과 생태 답사에 나섰다.
관광객이 많은 곳을 피해서
숨어있는 제주의 비경과 지질학적인 유산과 독특한 제주만의 생태를 살펴보았던 그 연수는 만족도 100점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연수였다.
연수강사님께 다시금 박수를 보내드린다.
연수 만족도에는 숙소와 음식이 1/3은 차지한다.
숙소는 서울시교육청과 MOU 맺은 호텔을 중심으로 엄청 탐색한 곳이고
음식은 내 몫의 강사료와 내돈내산을 부어넣은 맛집들로 준비했었다.
통새우가 올라간 우동, 갈치조림, 보말 칼국수와 해장국, 그리고 회와 오겹살이 반반씩 나오는 바닷가뷰의 식당은 모두에게 행복이었다.
이 곳들을 내돈내산으로 답사하고 찾아보고 예약하고 시뮬레이션 하던 그 과정 또한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 때 그 반짝거림과 머리 회전력은 어디 갔는지(다들 감탄했었는데)
퇴직 후 첫 번째 내 의지로의 제주 여행인데
고작 2박 3일 동안의 동선 짜기가 쉽지 않다.
그때만큼 신나지도 않는다.
늙어서일까? 아니면 혼자여서일까?
일주일 뒤인데 결정된 것은 비행기 시간과 숙소, 차 렌트를 하지 않겠다는 것 정도이다.
유튜브와 인스타를 보고는 있는데 저기 꼭 가봐야겠다는 전투력이 올라오지는 않는다.
호텔에서 뒹굴뒹굴 누어만 있는 것은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제주 바다뷰는 있겠다만.
먹거리도 그렇다.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것 말고 제주스러운 것을 먹어보자는 기본만 있을 뿐. 정한 것은 없다.
그리고 혼자 먹기에는 회나 오겹살, 갈치조림은 양이 부담스럽다.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에서 제주 여행 관련 유튜브가 돌아가고는 있는데 사실 별 관심은 없다.
한 가지 원칙은 있다.
현재 제주에 있는 친구, 제자에게 절대 연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들에게 매달려서 시간을 나누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앞으로도 나는 누구에게나 만나달라고 놀아달라고 하지는 않은 예정이다.
그들이 약속을 청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바쁘게 현생 중이고 나는 한가한 퇴직자이다.
(그래놓고는 마침 그 날에 제주에 놀러간다는 지인에게는 하루 만나서 밥을 먹자했다.
그날 회나 오겹살, 갈치조림을 먹어야겠다.)
오늘은 꼭 가보고 싶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번쩍 눈에 뜨이기를 소망해본다.
(사진은 어제 대구 출장에서 지나친 멋진 이름의 공간이다.
가볼만한 시간은 없었지만 내 눈을 끌기에는 충분한 가게 이름이다.
분명 과학 공부 열심히 한 사장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