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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레시피 145

추억의 물냉면과 주먹밥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침 6시부터 9시

그 난리와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기운이 쏙 빠진 느낌이었으나 오늘 유일한 일정인 염색을 하러 나섰다.

염색을 안하고 자연스러운 흰 머리로 사는 삶을 꿈꾸고는 있으나

내 마음 속으로는 모든 소소한 경제적인 활동을 접는

3년 후 부터라고 계획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사람도 만나고 무언가를 도모해야 하니 너무많은 흰 머리가 보이는 것은

조금 성의 없어 보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친구와 약속한 스케쥴의 변동이 있어 오늘은 나 혼자 염색을 한다.

염색이나 파마도 나의 컨디션에 따라 더 힘들기도 하고 약 냄새가 더 지독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머릿속이 따갑기도 한데 오늘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

휴대폰으로 이것 저것을 검색해보니 어느 새 염색이 끝나있었다.


배가 고픈데 맛집 많기로 소문난 홍대 앞에 딱히

오늘은 끌리는 식당이 없다.

그곳은 대부분 점심보다 저녁 장사 위주인 듯 싶었고(아직 오픈 전이 곳이 많다.)

직장인과 대학생의 점심시간에 딱 맞추어 혼밥을 들어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메뉴와 눈빛들이 느껴진다.

이럴때는 잘 알고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최고이다.

오랜만에 홍대에서 멀지 않은 모교 앞의 가미분식으로 향한다.

세월이 그리 흘렀는데도 가미분식은 그 장소를 지키고 있다.

사실은 버티고 있다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2층까지 꽉 찼던 테이블과

음식을 날라다주던 그 많던 아주머니들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1층에 10개 정도의 테이블에

아주머니 1명과 알바생1명만이 홀에서 움직이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때는 비싼 식당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이다.

양도 푸짐한 위 물냉면이 9,000원이다.

내가 좋아라 하는 주먹밥 4개가 10,000원.

그래서인지 아직은 테이블이 꽉차고 대기 손님도 있더라.

다행이다. 대학 앞 상가의 공실을 보면 마음이 조금 그렇던데 말이다.


5분쯤 기다렸다가 내 최애 물냉면을 시키고 주먹밥 2인분을 포장 주문했다.

(심한 입덧을 했던 그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나의 최애 메뉴 중 한가지였다.)

그런데 아직 날씨가 그래서인지 다른 테이블은 돌솥비빔밥과 우동이 대세이다.

홀을 둘러보니 대학생 일부에

나처럼 과거를 찾아온 사람들도 보인다.

물냉면이 나왔다. 역시 잘 아는 그 맛이다.

얼음 살짝 떠 있는 국물도 그렇고

이 집 특유의 꼬들꼬들 앏고 긴 단무지 맛이 여전하다.

다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깔끔하고 독특한 맛이다.


그런데 밖에는 대기 손님들이 여전히 서있는데

음식을 다 먹고도 5분 이상 대화를 나누는 그룹들이 있다.

짧은 점심시간에 이러시면 안된다.

(속으로 이야기하고 눈짓을 보냈으나 알아듣지는 못한 듯 하다.)

대학교와 연관된 직장인임에 틀림없어보이는데 말이다. 너무 여유롭다.

작은 식당에서 가급적 점심시간 바쁠때는

반찬도 자기가 셀프로 더 떠다먹고

다 먹고 후속 수다는 걸어가면서 하던지

찻집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다.

밖에서 대기하면서 사라지는 점심시간을 카운트해야 하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역지사지는 보편적인 생활의 지혜이다.


맛난 물냉면을 추억과 함께 먹고는 부른 배를 안고 모교를 한바퀴 돌아본다.

이렇게 이쁜 곳이었나 싶게 이른 봄꽃이 많이 피어있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목련도 벚꽃도 모두

만개 상태는 아니어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생들의 에너지가 사방에서 뿜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학교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젊은 에너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에게서 지식과 삶의 지혜를 배웠을지 모르나

나는 학생들에게서 젊음의 패기를 지속적으로 수혈 받고 그 에너지로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내에 나간김에 퇴직전 다니던 학교 근처 병원에서

두달치 혈압약도 받고 세달치 비타민 D 주사도 맞고

(그렇게 산책을 하고 햇빛을 좋아라해도 비타민D 합성량이 모자라다.)

목이 약간 따가운 듯하여 목감기약까지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총 16,154보를 걸었다고 나오니 조금은 무리한 셈이다.


그리고는 방금 전 포장해온 가미분식의

시그니처 메뉴인 주먹밥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했다.

소고기 볶은 것이 조금 들어있는 찰진 주먹밥은 겨자소스에 살짝 찍어서

역시 그 만병통치 그 집 단무지와 함께 먹으면 꿀맛이며 배가 든든하다.

내친김에 저녁 약도 먹고

제자가 보내준 귤생강차도 한 잔 마셨고

하나뿐인 아들 녀석은 회식이라하니 오늘도 일찍 쉬어야겠다.

아침에 카드 승인 문자 메시지에 놀라서 시작된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바보 똥꾸 멍청이에게도 하루는 24시간으로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래도 오늘은 내 최애 프로그램 진행 여부도 기사로 확인했고(기쁘고 다행이다.)

중복 예약건도 우여곡절 끝에 처리했으니

나름 선방한 하루이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일주일이 되었는데 지난 주 면접 결과는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나온다.

내일은 전화 문의래도 해봐야겠다.

설마 영어로 물어보라고는 안할테니 말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꼭 영어유치원에 다닐테다.

영어울렁증 극복을 위해서.

영어를 잘했다면(여기서 말하는 영어는 스피치이다.)

내 인생은 업그레이드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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