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마무리가 영 찝찝하다.

조금씩 조금씩 아귀가 안맞는 느낌이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침부터 부지런히 다양한 변수를 고려한 PLAN B까지 생각하면서 나름 열심히 움직였으나

오늘은 영 뭐하나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지 않더니

하루 마무리하는 시점에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그런 날도 있고 이런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한 날은

잠도 잘 자고 머리도 번잡하지 않기 마련이다.


첫 번째 어긋남은 11시 약속이었다.

한번 가봤던 곳이라 이번에는 조금 더 편한 방법을 찾아서 근처까지 버스를 타고

단 두 번의 시도 끝에 약속 장소도 잘 찾아두었었다.

스스로에게 대견한 마음이 드는 순간 갑자기

아픈 동생이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연락이 왔다.

가슴이 철렁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분명 아침도 먹고 집을 나섰는데

몸에 힘이 쏘옥 빠지는 기분이 든다.

어제까지는 에코백에 비상용 식량으로 바나나도 하나 넣고 다녔었는데

오늘은 조금은 격식 있는 자리에 가야해서 오늘

가죽 가방으로 바꾸면서 빼놓고 왔는데

하필 주변에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들어가서

믹스커피 한잔을 얻어먹고서야 첫 번째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두 번째 어긋남은 13시 약속이었다.

첫 번째 약속이 늦어지면서 13시 약속을 지키느라

점심도 건너띄고 오랜만에 달리기 수준의

빨리 걷기 신공을 취했다.

간신히 약속에 늦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가슴이 빨리 뛰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두 번째 미션까지 처리하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오랜만에 덕수궁 산책 갈 생각이 들었으니 많이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금 어긋난 그것이 더 신경에 거슬린다.


세 번째 어긋남은 늦은 점심을 먹으려 들어선 식당에서였다.

평소 덕수궁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한번은 들어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깡장집. 강된장을 의미한다.

짭쪼름한 맛이 입맛을 돋우어준다.

특히 덕수궁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신 노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계신다.

손님은 나혼자다. 늦은 시간이니 그럴수도 있다.

계산도 하지 않고 식사를 내어줄 생각도 하지 않고

두분은 계속 말싸움을 이어간다.

뻘쭘하여 다시 나갈까 싶은데 하필 입구 쪽에 앉아서 길을 막고 싸우신다.

두 부부는 분명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그래도 싸울 일은 존재하나 보다.

할 수 없이 싸움이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접어들때까지 덕수궁 입구의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며 기다렸다.

깡장은 괜찮았는데 국이 짰고 맛을 음미하며 천천이 먹을 정신은 이미 나갔다.


그래도 기분 좋은 덕수궁 산책을 마치고

화장실에 휴대폰을 두고 올 뻔한 위기도 극복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무언가가 조금씩 어긋남을 느낀다.

보리밥과 깡장을 신경 쓰며 먹어서인지 뱃속도 편한 것 같지 않고(원래 보리밥이 좀 그렇다만)

오전의 일처리도 되새겨보니 깔끔하게 된 것 같지 않고

저녁에 통화한 남편 목소리도 영 편치 않은 것 같고

동생은 더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중환자실에서 혼자 투병중이다.

무언가가 꿀잠을 청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조건이다.


그러다가 가장 찝찝한 일이 벌어졌다.

20여명 쯤 들어있던 단톡의 방장이 갑자기 말도 없이 톡을 나가버린 거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유를 몰라 뻘쭘할 수 밖에 없다. 당황스럽기만 하다.

나 때문인가 하는 오지랖이 발동한다.

늙은이의 자격지심 발동일 수도 있다.

나와 얽힌 별다른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할 수 없이 자는 것을 포기하고 야구를 틀어놓고

이 글을 쓴다.

글을 쓴다고 찝찝함이 사라질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나마 오늘 오전의 브런치글을 여러분들이 읽어주셔서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고 있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만 여하튼 그렇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것이다만.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것은 여전히 글을 쓰는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고양이 설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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