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아리송한 오늘 오전

이런 날도 있는거지. 뭐.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 아침 산책의 범위를 조금씩 넓히고 있다.

로봇 청소기를 눌러놓고 청소기가 돌고 도는 그 시간이 주로 내 산책 시간이 된다.

근처는 이제 갈만큼 가서 더 이상 새롭지가 않고

(늘상 끊임없이 새롭고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내가 문제다. 공간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결국 그곳들을 거치게 되니 범위를 넓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뚜렷한 목적이 없으므로 그 시간은 대부분

점심 시간 즈음에 마감하게 된다.


어제는 노량진역에서 용산역을 거쳐 삼각지역까지 돌아보고 왔다.

노량진역에서는 1번 출구를 거쳐 육교앞에서 노량진 야구장을 돌아본 것이 다이다.

다행히 내 최애 <불꽃야구> 팀이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고(선수는 두명 밖에 못보았다.)

작은 소리로 파이팅을 해주었다.

찐오타쿠의 소심한 응원이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내 생애 그냥 그 장소라도 방문해서 응원해주자는 마음이 들기는 또 처음이다.

아니다. 첫사랑 그녀석의 집 앞을 배회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누군가를 혹시나 운명처럼 만날까 싶어서 출몰 예상 지역을 왔다갔다 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어제 딱 그런 마음으로 노량진 야구장을 바라보러 갔었다.

아직도 그런 애틋한 마음이 남아있다니 좋아해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만.

용산역에 있는 몰에서는

어르신 생활 입문용 크로스백 스타일 가방을 샀고

(오늘 처음 착장하고 나갔는데 지하철에서 더 마음에 드는 것을 보았다. 꼭 사고 나면 눈에 띈다. 머피의 법칙이냐 뭐냐.)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 순대국을 반쯤 먹었고

(2024 순대국집 브랜드 1등이라는데 딱히 특별하지는 않았다.)

예전 나의 산책 코스였던 지금은 맛집 골목으로 변신한

신용산역에서 삼각지역 사이의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직장인들 점심시간의 즐거움을 백번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모두들 그렇게도 즐겁고 신나는 표정이더라.

그리고 그들의 목에 걸린 회사 출입문 태그하는

그 명찰이 예나 지금이나 부럽기만 하다.


오늘 아침에는 혈액검사와 혈압약 받아오기 미션을 자체적으로 부여했었다.

다음 주 안에 가면 되는 것인데 나는 오늘로 픽한 것이다.

아침을 안 먹고 가야 혈액 검사가 가능하니 출근길을 약간 지난 시간에 움직여본다.

그래도 지하철에 사람은 꽤 있다.

출근 시간이 몇시까지인 직장인지 모르겠다

좋은 직장일 것이다.

그런데 처음보는 숫자의 혈압이 기록된다.

두 번 측정했는데도 최고혈압이 100이 안된다.

세번째 측정인 의사선생님의 수동 체크에 겨우 100/60이 기록된다.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다.

유전에 의한 본태성 고혈압 판정을 받은지 20여년째이다.

혈압을 낮추는 약을 매일 일어나자마자 먹는다.

최고 혈압이 150을 찍어서 입원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혈압이 이렇게 낮다고?

이유는 알 수 없다. 컨디션 탓인지 날씨 탓인지 소식 탓인지...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다. <너무 마르셔서...>

한때는 살쪘다고 운동을 해야한다고 핀잔다운 이야기를 들었었고

또 얼마전까지는 체중 관리를 잘 했다고 칭찬을 들었었는데

이제는 너무 말랐다고 한다. 뭐든 중간이 쉽지않다.

지난번 그 맛없던 동태탕 이슈 이후로 잘 먹지 못한 것은 맞지만 말이다.


일단 혈액만 채취하고 혈압약은 받지 못하고

오늘의 결과를 보러 올 때 다시 측정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또 아리송한 일이 일어났다.

혈액 채취하려고 겉옷을 벗었더니 왼쪽 윗쪽 팔에 동그란 큰 도장을 찍은 것 같은 눌린 자국이 보인다.

간호사님이 무슨 자국이냐고 묻는데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알리가 없다. 뭐 특별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자는데 저승사자가 낙인을 찍어놓은 것인가?

간호사님이 저런 분들이 가끔 있다고 한다.

본인도 궁금하다고...

채혈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에 분명 조금도 어지럽지는 않았고

엘리베이터가 안와서 계단으로 내려오다가(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대거 집합하러 내려오나보다. 3층이었다.)

하마터면 발을 헛딛고 넘어져서 큰 사고가 날뻔 했는데

난간을 잡아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이전 글을 확인해보자. 계단을 조심하고 난간 근처로 다니자고 했었다.

하마터면 곧장 옆 정형외과로 이송될 뻔 했다. 다행이다.

계단 간격이 코너를 돌면서 다른 계단보다 더 깊은 각도였다.

다치기 딱 좋은 환경이다. 핸드폰 보면서 다녔다가는...

아주 약간은 놀라서 옛 동료의 스승의 날 선물 쿠폰으로

달달구리 케잌과 커피를 급 수혈하기로 한다.

혈당도 혈압도 높여야 할 필요성이 있을 듯 해서이다.

그런데 이제 저 케잌도 너무 달아서 도저히 한번에 다 먹을 수는 없겠다. 당분간 빠이빠이이다.


알배추겉절이와 총각무김치 조금씩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풍 나온 중학생들과 삐약삐약 유치원생들(선생님들 고생많으시겠다.)

그리고 또 열심히 수채화를 그리는 미대 지망생들을 만났다. 남학생은 딱 한 명이더라.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고 심지어 만성 두통도 없는데 혈압은 낮고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서 제주 맛집 투어 유튜브를 마냥 틀어놓아 보기로 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아리송한 오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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