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32
덕질의 완성
어제는 최강야구를 직관하러 고척돔 야구장에 갔었다.
야구장과 같이 야외에서는(고척돔은 야외는 아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 국룰이다.
야외에서 기분 좋게 먹는데 맛없는 것은 진짜 맛이 없는 것이다.
아마 티켓을 일찍 준비했다면 여러가지 먹을 것을 준비해서 집을 나섰을 수도 있었겠지만
갑자기 구한 거라 그럴 시간은 없었다.(취소표 한장을 간신히 구했다.)
나름 일찍 나섰지만 이미 맛집으로 소문난 크림새우가게 앞에는 줄선 사람이 많았고
사실 그 한 팩을 다 먹을 자신도 없었다.
무엇을 먹을까 한 바퀴 둘러보아도 딱히 눈길을 끄는 곳은 없었고
간단히 김밥을 먹고 싶었는데 김밥집은 없었다.
왜 없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으나 답은 구하지 못했다.
그럴 때는 가장 간단하고 작은 양이 가능한 것으로 선택한다.
떡볶이를 메인으로 하고 튀김을 할까 순대를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튀김이 양이 더 많고 식었을 때 먹기가 불편할듯하여 순대를 선택했다.
생각보다 따뜻하고 맛이 괜찮았다.
역시 따뜻함이 음식의 맛을 판정하는 큰 요인 중 하나인 것이 틀림없다.
줄 서는 식당이 맛집일 확률이 많지만 줄 없는 식당이 맛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나는 혼밥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혼자 구경 다니는 것은 괜찮다.
갑자기 취소표를 구한지라 자리는 4층 가장 꼭대기(화장실 다녀오기가 힘들다는 것빼고는 볼 만했다. 어차피 선수들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경기 맥락을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옆자리에는 사투리가 구수한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아버지가 앉았다.
아들과 아버지는 누가 봐도 똑같이 생긴 얼굴로
햄버거와 감자 튀김과 탄산 음료를 나누어 먹으면서, 박수와 응원을 함께 하면서
그 나이치고는 제법 고차원적인 야구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불현듯 기억나는 한 장면.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랑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그 당시 유행하던 고교야구를 구경한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야구 중계를 들으면서 공부를 하고
야구 배팅 오더를 안내하는 장내 아나운서 흉내를 내는 큰 딸이 못내 이상했었나보다.
야구 구경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한 적도 없는데 어느 주말 나만 데리고 야구장 나들이를 하신거다.
아버지랑 어디를 단 둘이 가본 적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 날 나는 아버지 옆에서 응원 소리를 숨기면서 눈을 반짝이고 야구를 보았고
내 머리 위로 날아오는 파울볼을 보고 아버지는 황급히 머리를 감싸주었었다.
나는 파울볼이 그렇게 멀리까지 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 당시 라디오로만 듣던 야구와 직접 보는 야구는 참으로 달랐었다.
그때 나는 왜 아버지와 야구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음식을 같이 먹으며 소리내 응원을 하면서
그 시간을 즐기지 못했던 것인지 이제와서야 옆자리의 아버지와 아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아버지와 함께 음식을 먹으면 항상 혼나기 일쑤였다.
여자가 먹으면서 입에서 쩝쩝 소리가 너무 난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더 큰 쩝쩝 소리가 난다. (본인은 그걸 모르시는 듯 했다.)
구강 구조와 먹는 방법도 닮는 법.
그래서인지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는 늘상 불편했다.
조심스럽게 입을 조무리고 먹어야하니 음식맛을 오롯이 느낄 수 없었던 거다.
항상 여자답게를 강조하셨던 기숙사 사감 같으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여자답지 않게(?) 야구를 좋아하던 나를 혼내지 않으시고 야구 구경을 함께 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나는 그 비밀을 풀지 못했다.
그때보다 더 심하게 혼나더라도(이제는 아버지의 잔소리쯤은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다.)
아버지와 쩝쩝거리면서 맛난 것을 먹을 수 있다면(메뉴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옆 자리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야구를 함께 볼 수 있다면(내가 좋아하지 않는 격투기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은 아버지. 보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