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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cent Jan 18. 2022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위즈덤하우스, 2016)

2017년 4월 16일 밤 휴학 신청을 했습니다. 그날은 휴학 신청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는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학교 포털 시스템에 접속해서 '휴학 신청' 버튼만 누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휴학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자 잠깐의 안도감만 생겼을 뿐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실패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깊은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일상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더는 내 삶의 과제들을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가득해진 것이죠. 수업시간엔 집중하지 못한 채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기만 했고, 순간의 용기를 내서 도전했던 다른 활동들도 얼마 가지 아 힘겨워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죽은 채 살아갔습니다.


 휴학 신청 후 나타난 불안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일상에 작은 불쏘시개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내 곧 포기해버렸습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게 주어진 과제 완수하지 못하는, 실패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책을 집어 듭니다. 실없는 뻔한 소리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고, 소설 속 주인공이 맞는 행복한 결말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어떤 인터넷 페이지에서 봤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소설책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꿈이 없던 소년이 피아노를 만나 꿈을 찾아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양과 강철의 숲(2016)>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설 <양과 강철의 숲은> 제 예상과 다른 소설이었습니다. 극적인 반전도 없고, 주인공의 원대한 꿈이 이뤄지지도 않은 채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 사건과 에피소드들이 발생하긴 하지만, 주인공은 그저 관찰자로 나올 뿐입니다. 뭔가 제가 원했던 뻔한 도식에서 벗어난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저에게 작은 울림을 주었는데요, 그것은 끊임없이 일상을 이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때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되는대로 직장을 얻어 그럭저럭 살아가려던 주인공 '도무라'고등학교 체육관에 있던 피아노를 조율하러 온 '이타도리'씨를 마주합니다. 이때 도무라는 당시 이타도리 씨가 피아노 조율하는 모습을 보고는 갑작스레 피아노 조율사가 되리라 결심하는데요, 그 짧은 순간 도무라는 가슴 벅찬 감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도무라는 그 당시 들었던 피아노 소리를 '숲 냄새'에 비유했습니다.




"숲 냄새가 났다. 가을, 밤에 가까운 시간의 숲"



 어린 시절 그의 가슴을 뛰게 해 준 숲 냄새가 피아노 소리로 변주되어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도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타지로 나가 조율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이수합니다. 그리고 이타도리 씨가 근무하는 '에토 악기'에 조율사로 입사하게 됩니다.


이후부터 그는 선배 조율사와 함께 가정에 방문하며 현장에서 조수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도무라는 한 때 유망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선배 조율사들의 조율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괴로운 순간과 계속해서 마주합니다. 일반적인 조율 학교를 갓 졸업했을 뿐인 도무라에게 조율은 점차 너무나 아득한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어려운 조율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좋은 소리를 낼 줄 하는 좋은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자 고군분투합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밤 악기점에 있는 피아노로 조율 연습을 합니다. 그 시작은 기준음이 되는 '마흔아홉 번째 라 음'을 440Hz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무라는 자신이 선망하던 조율사 이타도리 씨를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그를 조율사의 세계로 인도한 인물이자 조율사 사이에서 독보적이라 평가받는 그에게 도무라는 곧장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조율을 할 수 있는지"를. 하지만 돌아온 답은 애매모호한 야구 이야기였습니다.




"차근차근 수비하고 차근차근 히트 앤드 런입니다."


"홈런을 노리면 안 됩니다."

 


 도무라는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는 충고였다.'라고 표현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이타도리 씨의 말을 실천해갑니다. 차근차근,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악기점의 피아노를 여러 차례 조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무라는 하루하루를 조금씩 채워나갔습니다. 도무라는 여전히 부족한 조율사였지만 조율사로서 본인의 일상을 이끌어나간 것이죠.


저는 그런 도무라와 달랐습니다. 물론 도무라 역시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했지만 대신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망가는 사람이었던 거죠.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점차 나아지는 그 고단하고 지난한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더욱더 웅크리고 마음 속 감옥으로 침잠해 갔습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실패라더라도 하루하루 차근차근 살아간다면 분명 달라지고, 그 미래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상에 이끌려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일상이 버티지 못해 결국 무너져버렸 불안만 커져갔습니다.


여전히 이 무기력함과 열등감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진 못했습니다. 다만 '의미 없는 행동은 없다'는 생각으로 뭐라도 해보자라는 생각을 애써 떠올리려 합니다.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작은 성공들입니다.도무라가 매일 밤 악기점의 피아노를 조율했듯이, 저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세수하고, 이를 닦습니다. 그리고 아침밥을 챙겨 먹습니다. 그렇게 작은 성공을 한다면 다음으로 뭘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내 일상을  나 스스로가 채워나간다면 그것으로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때는 그마저도 힘들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는 내 인생 속 수많은 아웃 카운트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면 저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어보려 합니다..


 피아노 조율사들은 기본으로 '마흔아홉 번째 라'음을 잡고, 440Hz에 맞춘 뒤 조율을 해나간다고 합니다. 당신의 하루를 여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들의 일상을 열어주는 기본음이 무엇인지 한 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하루가 되더라도 그것이 우리네 일상을 무너지지 않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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