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찌푸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한바탕 쏟아질 거 같다. 저 멀리 낡은 '행복슈퍼' 간판이 보인다.
"아저씨 저기 빨간 벽돌로 된 3층 빌라 앞에 세워 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나는 캐리어를 끌고 행복슈퍼 입구로 들어섰다. 여긴 그대로다. 빨간색으로 '쌀', 검은색으로 '행복슈퍼'라고 커다랗게 적힌 간판이 있다. 군데군데 슬어있는 녹에 세월이 녹아있다. 그나마 햇살 좋은 날은 괜찮다. 비 오는 날은 낡은 간판이 스산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간판 좀 바꾸자고, 바꿔 준다 해도 고집이다. 그깟 낡은 간판이 뭐라고 버티는지 모르겠다.
그 아래에는 초록색 줄무늬 차양막이 길게 뻗어있다. 여름 햇살 못지않게 가을볕도 따가운데 쉬어갈 그늘을 만들어주고, 비가 올 때는 잠시 비를 피하게 도와준다.
그냥 쓰기 미안한 손님들은 쭈볏쭈볏 슈퍼로 들어와 뭐라도 사거나 자판기를 이용하니 차양막은 행복슈퍼 매출에 1등 공신이다.
입구에 앞에는 녹색의 작은 의자가 있고 그 옆에 아이스크림 냉동고와 커피 자판기가 서 있다. 방금 날 내려준 택시 아저씨는 기지개 피고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후루룩 하고 마신다. "캬아~ 역시 커피는 믹스커피지. 이 집 커피 잘하네." 아저씨 말에 내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직 가을이지만 정오의 날씨는 살짝 덥다. 냉동고 문을 열고 붕어 싸만코 아이스크림을 꺼내 한입 베어문다. 달콤하고 시원한 냉기에 기분이 좋아진다.
"화(花) 여사 나 왔어!"
놀란 토끼눈의 화(花) 여사와 마주한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다. 휴가 받았다고 말하며 슈퍼 안쪽 작은 방으로 들어가 벌러덩 눕는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지만 목구멍으로 삼키는 게 다 보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대 같은 얼굴로 웃는다. 배 고프다는 말에 화(花) 여사는 2층에 짐 풀고 내려오라고 하며 반찬은 없으니 대충 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행복슈퍼 2층은 화(花)여사가 산다. 3층은 월세를 준다고 했다. 세입자에 대해 들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나 사는것도 바쁜데 나와 상관없는 세입자까지 기억 할 여유는 없었다.
2층 문 여니 단정한 공간이 나를 맞이한다. 돼지우리 같은 내 집과 영 딴판이다. 자연스레 내 방으로 갔다. 그 곳도 7년전 그대로였다. 어쩜 이렇게 먼지 한톨도 없는지.
화(花)여사의 깔끔함에 새삼 감탄하며 곳곳을 살펴보고 있으니 아래층에서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내려가니 상 다리 부러지게 차려져 있고 머슴밥이다. "얼마나 일을 시키려고 밥을 이렇게나 줘??"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 라는 말에 입 다물고 어떻게 밥을 먹냐고 하려다 참았다. 그 말은 분명 등짝 스메싱감이다. 쉴려고 온거지 맞으러 온건 아니니 자제해야 한다.
후식으로 과일을 먹고 있으니 초등학교 5학년정도 되는 여자 아이가 인사 하며 들어온다. 자연스러운 발걸음을 보니 처음이 아닌거 같다. 여자아이는 나를 보더니 당황해 한다. 나도 당황스럽다. 익숙한 풍경 속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존재다.
동시에 화(花)여사를 쳐다본다. 화(花)여사는 어깨 한 번 으쓱하더니 주인 기다리는 포크앞에 앉으라고 한다.
어색한 침묵 속에 불편한 시간이 끝났다. 아이는 서둘러 나갔고 나는 화(花)여사를 추궁했다. 그새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냐는 말에 내 등에서 불이 났다. 세월은 흘렀지만 화(花)여사의 파워는 녹슬지 않았다.
등짝이 얼얼하고 눈물도 찔끔났다.
"아~!! 그럼 누군데?!" 맞은게 억울해 툴툴거리면서 묻자 "3층 사는 애야" 라는 답이 돌아왔다.
3층 세입자 딸인데 그 집 엄마가 일 다니느라 아이 보는게 어려워 조금 챙겨봐준다고 했다.
"밥값, 방값 안 받을테니, 너도 세은이 동생이라 생각하고 잘 챙겨! 숙제도 봐 주고! 알겠지?"
졸지에 난 20년 넘게 차이나는 동생이 생겼다.
세은이의 하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먹고 학교가는 길에 슈퍼에 들려 인사한다. 하교 후 1층 슈퍼로 와 숙제와 공부 하며 화(花)여사 일을 돕는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면 세은이 엄마가 퇴근 하시고 모녀는 3층으로 올라간다.
세은이는 야무지고 빠릿빠릿해서 화(花)여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제 할일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슈퍼일을 도왔다.
화(花)여사가 친구도 만나고 나가 놀라고 하지만 괜찮다고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런 세은이를 보는 화(花)여사의 얼굴에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공존한다. 화(花)여사의 표정과 세은이의 행동은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 행동들과 표정을 보니 옛날 일이 떠 올랐다. 세은이는 나와 똑 닮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시간까지 행복슈퍼에 있는 화(花)여사가 안쓰러웠다. 화(花)여사는 일하는데 나는 친구들과 나가 놀자니 죄 짓는거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화(花)여사는 한번도 일 도와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실컷 놀라고 했는데, 내 마음 편하고자 슈퍼에 들어앉았다. 손님 맞이하고 물건 정리도 하고 청소도 했다. 그때마다 화(花)여사는 고맙다고 말했지만 미안함과 자책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서로 배려하느라 진짜 이야기는 거의 해 보지 못했다. 화(花)여사는 세은이를 통해 예전의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은이 모녀 관계도 우리와 비슷할거 같았다.
나는 세은이를 불렀다.
"언니랑 같이 갈 때가 있어 가자! 화(花)여사 우리 다녀올게" 당황한 세은이 손을 잡고 슈퍼 밖으로 나오니 노란잎이 만개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위로 파란 하늘도 보인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어 크게 들이마시니 고약한 은행 냄새도 섞여 들어온다. 은행나무 옆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러 온 여자분과 가벼운 눈 인사를 한다. 슈퍼에서 5m 걸으면 보이는 노랑구름 카페로 갔다. 여기는 커피 맛도 좋은데 주인 아주머니 입담도 재미있다. 그래서 늘 붐비는데 다행히 자리기 있어 앉았다. 아이스비엔나 커피와 딸기라떼를 주문했다. 어색해 하며 음료를 먹는 세은이를 바라봤다. 역시 나 같다.
"너 화(花)여사한테 미안해서 슈퍼 일 도와주는거야?"
".....네"
"왜?"
"그야 아주머니가 절 챙겨주시니까요"
"하지만 그건 화(花)여사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잖아. 네가 미안해 할 이유는 없는거 같은데"
세은이는 아무말 없이 손만 꼼지락 거린다.
"미안한 마음이 크니? 아니면 고마운 마음이 크니?"
"네?"
"화(花)여사에게 어떤 마음이 더 크냐고 물었어. 미안한 마음이 더 크면 나중에는 원망으로 바뀌더라고. 상대방은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미안함에 갚아가다 줄어들지 않으니 나중에 다 그사람 탓을 하게 되더라.
내가 그랬어. 화(花)여사는 슈퍼 일 도우라고 안 했는데 미안한 마음에 도왔거든. 그런데 하루종일 거기에 있어보니 답답한거야. 슈퍼를 벗어나고 싶은데 미안함에 그러지 못했어. 그래서 화(花)여사를 원망했어. 엄마 때문이라고 엄마 때문에 하고 싶은걸 못 했다고 악다구니를 하며 쏟아냈지. 정작 거기에 나를 묶어둔건 나 스스로인데 그때는 몰랐지. 갚을 수 없을정도로 미안함이 커지니 원망만 하더라. 네가 나 같아서 하는 말이야. 슈퍼에 안 붙어 있어도 된다고!! 화(花)여사도 원하지 않을거고.
세은아~ 어머니가 너 때문에 고생한다 생각하겠지만. 물어봐라. 아마 너 덕분에 열심히 산다고 하실걸. 철 일찍 들지 말고 또래 아이들처럼 놀고 어리광도 부렸음 좋겠어. "
눈시울이 붉어진 세은이를 보고 펑펑 울어도 된다고 말 해 주고 커피를 마셨다. 하고 싶은 말을 해서 그런지, 커피가 차가워서 그런지 시원하고 개운했다.
오늘은 언니가 쏘는 날이라고 외치며 손을 잡고 동네 구석구석 구경했다. 우리의 일탈을 반긴 하늘이 도왔는지 일찍 문을 연 용자 노래방 가서 노래도 불렀다. 미소가 예쁘신 사장님은 서비스도 화끈하셨다. 부르다지쳐 노래방을 나왔다. 당분간은 노래방 안 가도 되겠다. '햇살처럼' 이란 간판이 붙은 인생네컷 가게가서 사진도 찍었고 그 옆에 밤이 꽃 집도 갔다.
노란색 메리골드 가득해서 2다발 사서 각자 엄마에게 드렸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이라는 꽃말처럼 행복이 가득 찾아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수다쟁이가 되어 퇴근한 엄마에게 오늘 일을 말하는 세은이 얼굴이 환하다.
그래 행복이 뭐 별거있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으면 행복이지.
슈퍼 문을 닫고 엄마와 맥주 한 캔 마시면서 말했다.
"엄마. 나 사실 회사 휴직했어. 좀 쉬고 싶어서. 몸도 마음도 지쳐서 휴직을 신청했는데 받아주더라고. 내가 놓칠 수 없는 인재였나봐" 내 능글맞음에 엄마가 웃음을 터뜨린다.
쉬면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엄마 말에
"나 글 쓸거야. 작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어. 무..물론 매일 글을 쓰지는 못 하지만...쓰다보면 되겠지??"
"그래 내 딸!! 넌 할 수 있어. 꼭 작가 될꺼야. 그럼 서울은 언제 올라가니?"
"아니 나 여기 있을건데?"
"뭐어~????!!!!!!!"
"내가 잠깐 슈퍼 봐 주면서 소재 찾고 글 쓰는동안 엄마도 하고 싶은거 해. 여기 옆에 요가 학원도 있고 뒤에 동사무소에는 노래교실, 댄스교실도 있더라"
엄마 눈이 반짝인다. 행복슈퍼에 갇혀 하고 싶은 걸 못한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인 나는 나만 챙기면 된다하지만 엄마는 어디 그럴 수 있었겠는가? 자식의 생존도 책임져야 하는 무게감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지만 엄마는 내색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 보다 고마운 마음이 더 커진다. 이제 엄마의 무거운 짐을 덜어줄 때가 됐다.
슈퍼 안의 메리골드가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밤. 여기는 더 이상 낡은 간판이 스산해 보이지 않는, 진짜 행복이 시작되는 행복 슈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