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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Jan 14. 2024

애쓴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는다

'퍽!'

메추리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냄비 안에 있던 양념들이 검은 비가 되어 떨어졌다. 피할 새도 없이 검은 비를 맞은 손에는 열감과 통증이 남았다.

내 잘못이었다. 메추리알 장조림을 조금 더 졸인다고 불 위에 오래 두었고 화가 난 음식은 '꾸륵꾸륵' 소리 내며 항의했다. 살살 달래야 했는데 당황해서 차가운 스텐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성질 급한 메추리알 하나가 터지면서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에 뜨거운 양념이 내려앉았다. 오래 씻어 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금방 손에 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곧 가라앉을거라 생각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아니 자만심이겠다. 가벼울거라 생각했지만, 화상 범위가 새끼손톱만 했다. 예상보다 큰 상처에 당황스러웠다.

 일요일 늦은 저녁 시간이라 약국도 병원도 갈 수 없고, 집에 화상연고도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사치였다.

내 몸 돌보기보다는 눈앞에 일들을 해치우는 게 급했다.

내일 되면 괜찮아질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기대감도 있었다.

손가락의 화기(火氣)가 노여움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날이 되자 화상부위에 혹처럼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전날 홀대에 대한 노여움의 결과였다. 그 물집을 보고 나서야 꽤 심각한 상처라는 걸 았다.

챙기지 않는 주인 때문에 알아서 살뜰히 챙기는 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물집이 잡히면 2도 화상이라 보험금 청구 가능하다고 어디서 봤는데'라는 불순한 생각이 들었다. 제 몸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퇴근 후 병원을 갔다. 예상대로 2도 화상이었고 보험금 청구도 가능하다고 들었다.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보험금 청구 가능하니 보상받는다는 기분이었다.

관련 서류 발급을 부탁하는 내 말에 선생님은

"며칠 나와야 합니다 진료 끝나고 발급해 드릴게요" 하고

손가락 치료를 하셨다. 마지막에 감긴 붕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니

"절대 물 들어가면 안 됩니다! 상처가 꽤 심해요" 무심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별거 아닌 줄 알았던 화상 상처로 일상은 불편해졌다. 씻을 때 물이 들어가지 않게 비닐장갑을 끼고 입구를 테이프로 돌돌 말았다. 그래도 혹시 물이 들어갈까 오른손을 높이 들거나 뒷짐 지고 씻었다.  씻는 일뿐만 아니라 글을 적을 때도, 요리를 할 때도, 장갑을 낄 때도, 빨래를 널 때도 불편했다. 퉁퉁하게 감긴 붕대에 닿는 물건의 촉감은 낯설었고 손가락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가락을 움직여 봤다. 혹시 굳어 가는건 아닌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 불편함과 달리 세 번째 손가락은 가장 호사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긁히거나 다쳐도 밴드 하나 붙여주지 않던 주인이 자신을 극진히 대우하고 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리라. 마음 편하게 상처 치료와 피부재생에 힘쓸 수 있었으리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내 몸을 챙긴 적이 있나 싶다. 가족들 식사는 정성 들여 챙기지만,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면 대충 때우거나 건너뛰기도 했다. 가족이 아프면 부리나케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가보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약국의 약으로도 낫지 않으면 병원을 찾았다.  

를 챙기는 일은 '오늘부터 꼭 운동할 거야' 하고 외치는 다짐 같았다.  다른 일에 밀려 결국 지키지 못하는 다짐. 못해도 미안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는 말. 지금 당장은 표시 안 나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갈아먹는 행동이었다.  


2주가 지나고 이제 치료가 끝났다는 말을 들었다. 보험금 청구 서류를 받아 나오면서 다시 돌아온 일상에 감사함을 느꼈다.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 2주 전의 나는 불편했었고 지금은 시원함을 느꼈다. 

상처부위에 검은색 죽은 피부가 붙어있었다. 억지로 떼어내지 않았지만 조금씩 떨어져 나갔고 그 자리에는 새살이 돋아나있다. 본래의 피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잘 아물었다. 보험금 때문이긴 했지만 낫기 위해 애쓴 시간은 칭찬해 주고 싶다. 낯설지만 스스로를 위하는 일들을 하나씩 하며 나를 아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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