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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이 좋아 Jul 25. 2024

아빠의 메모를 보며

일상으로의 여행 #4

나는 여자다. 여자인 나를 싫어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엄마를 바라볼 때마다 여자의 삶이란 눈물로 채워야 할 버려진 유리병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정에 들렀을 때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메모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이미자 1447번."


짧은 메모였지만 아빠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필체가 엉성한 것은 말기 폐암으로 고생해서 손에 힘이 빠진 탓도 있지만 아마 평생 몇 자 써보지 못한 적었던 배움의 기회를 말해주고 있었고, 이미자라 함은 아빠의 젊은 시절인 1960년 70년대를 풍미한 가수이기 때문에 아빠의 음악적 취향과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진보다 더더 아빠 같은 필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긋이 물었다. '왜 그렇게밖에 못 사셨냐고.' 이건 원망의 문장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아빠를 완전히 용서했다. 하지만 내가 묻는 건 어릴 적 나와 자매들 그리고 한 여자가 겪지 않아도 될 전쟁 같은 삶을 살았던 그 시간에 대한 원망이고 물음이었다.


세상이 폭력적인 건 나쁜 남자들 때문이라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어린 나는 길가에 묶여 있던 하얀 털을 가진 옆집 개가 망치로 머리를 맞아 피로 물든 이마를 하고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주인도 주인이라고 꼬리를 낮게 붙이며 살살 흔들던 꼬리를 보았다. 폭력의 광기와 그 광기를 운명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순한 것들이 처한 극한 잔상들을 통해 세상의 비뚤어짐을 보았다.


견디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을 엄마의 삶 속에서 배웠기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 상황을 타파할 힘도 기회도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매일 전쟁의 상황에서 총알받이의 마음으로 시간의 블록을 쌓아왔다. 나이가 들면 더 괜찮아질 거야라고 여자들끼리 연대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한숨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매일이 서바이벌이었다.


하지만 이런 아빠도 돌아가시니 슬픔이란 게 찾아왔다. 슬픔에도 겹겹이 쌓인 깊이가 있으며 슬픔은 한 가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슬픔은 하루의 모든 시간에 불쑥불쑥 예의 없이 찾아왔으며 나를 목 놓아 울고 싶은 어린아이로 만드는 순간도 있었다. 이제는 덤덤해진 그 죽음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정화된 슬픔이며 날것의 핏기가 다 빠진 흑백의 정형화된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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