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0
2024년 6월 28일
순례길을 떠나기 한 달 전.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되었던 이유와 현재의 마음가짐을 기록해 놓고자 한다.
나는 힘든 여행이 질색이던 사람이었다. 20대 초반엔 가난해서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했고, 돈을 벌던 20대 중반에는 동남아 휴양지만 두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현생이 바쁘고 고되다 보니 여행에서만큼은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고, 돈을 펑펑 쓰면서 쉬고 오는 게 여행의 전부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러다 교사가 되고 내겐 적당한 시간도 에너지도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코로나 시국이 지나고 교사 3년 차에 간 첫 해외여행지는 대만이었다. 23년 2월의 4박 5일 일정이었다. 여행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을 칠 겸 다녀오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애인과 나의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다. 대만에서는 타이페이와 우라이를 갔다. 해외여행에서 처음으로 해보는 긴 이동시간도, 대중교통 이용도 전부 새롭고 신났다. 대만의 세련되고 젠틀한 젊은이들과 멋진 펍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것도 좋았고, 우라이 온천과 대만 산의 이국적인 모양새도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첫 여행의 기억이 좋았기에 우리는 다음으로 꽤 긴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24년 1월, 11박 12일의 베트남 여행이었다.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사파, 푸꾸옥을 갔다. 11박 치고는 이동이 많은 편이었는데, 내가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간 김에 다양한 도시들을 경험하고 최대한 오래 있다 오고 싶었다. 베트남 여행은 살이 3kg 정도 쪄서 왔을 정도로 정말 좋았다. 도시마다 분위기가 색달랐고,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경과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만나며 느낀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만치 긴 여행을 누군가와 함께 해본 것이 처음인 나로서는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았다.
나는 인간에게 에너지를 많이 쓰는 편이다. 인간관계에서 눈치도 빠르고 상황 파악도 빠르다. 타인의 감정 변화에도 민감한 편이다. 긴 여행이었고 이동도 잦았던 탓에 애인의 컨디션이 항상 좋을 수는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많은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지라고 해서 항상 즐거울 수는 없는 노릇이건대, 애인이 조금만 피곤하거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기분이 다운됐다. 반면, 내가 힘들거나 피곤할 때는 필요 이상으로 티 내지 않으려 하고 그 이상의 텐션을 내기 위해 억지로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이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과 별개로 정신적으로는 조금 지쳤고, 누군가와 긴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한 회의까지 들었다.
돌아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여행 중 들었던 생각들을 애인과 이야기 나눴다. 애인은 여행 내내 정말 별다른 생각 없이 잘 즐기고 있었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남들의 기분을 맞추고자 내 기분이나 상태는 고려하지 않는 나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 타인의 감정은 세심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데, 정작 나 스스로에게는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힘듦은 스스로 잘 알아채지도 못하거니와, 알아차린다고 해도 방치하거나 억압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혼자 가는 해외는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순례길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몰랐다. 처음 순례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애인 때문이었다. 애인은 원래부터 자연을 좋아하고 등산을 즐기던 사람이다. 20대에는 네팔에서 히말라야 트래킹도 경험한 바 있다. 애인은 언젠가 나와 함께 다시 네팔 트래킹을 가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함께해 주고 싶은 나는 해당 여행지들의 정보를 찾아보며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고 위의 여러 생각들을 하던 차에, 여건 상 올해는 해외여행을 함께 가기 어렵다고 하는 애인에게 그러면 나 혼자 순례길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나에게 있어 어떤 길이 될지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 당연히 불안하기도 하다. 모든 과정을 혼자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그럼에도 새로운 도전과 모험은 항상 나를 설레고 두근거리게 한다. 우울증이 한참 심하던 때 혼자 템플스테이라도 며칠 다녀와야 내가 나를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우울증이 호전된 채로 살다 보니 그 결심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야 그때의 생각을 직접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의 나는 피곤함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끝까지 체력을 몰아 쓴 뒤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쉬곤 한다. 내가 쉬어야겠다고 느끼는 타이밍은 몸살기가 돌기 시작할 때인데, 머리가 띵하듯 아프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증상이 나타난다. 그렇게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낼 때까지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는 것이 일생 동안 안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혀 왔다.
순례길을 건강하게 예정대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반드시 잘 살펴야 한다. 하루에 걸어야 할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 상태와 체력을 면밀히 점검하며 절대 무리하지 않아야 한다.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욕심을 내면 반드시 다치거나 아프게 된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어떨 때 내가 힘든지, 그 힘듦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 고행을 하다 보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오직 나만이 나와 함께할 뿐이다. 그렇지만 의지할 곳 역시도 없다. 힘듦과 외로움 등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내 한계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순례길을 걷는 나를 그려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 하는 순간, 그 무엇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순례길을 걷는 나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던 방향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홀로 떠나는 고행의 길이 어떤 형태로 마무리 지어진들 나에겐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