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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랑크톤 Jul 02.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4년 7월 2일





 곧 내릴 때가 된 것 같아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퇴근 후 영화관을 다녀왔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내용이라고 알고는 있었으나, 별생각 없이 팝콘을 사들고 들어갔던 나는 10분의 1도 먹지 못한 채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상영관을 나왔다.


 영화의 시작에 관객들은 약 2분간 블랙스크린을 보며 소리만 듣게 된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근원을 추측했다. 점차 하강하는 듯한 배경음에 기계음 같은 소리들이 얹히다가, 후에는 새소리가 들리며 화면이 시작된다. 영화가 끝나고 생각해 보니 보이는 것보다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감독의 매우 직설적인 연출이었구나 싶었다.





 영화 내내 우리는 눈과 귀의 불협응을 느낀다. 아름다운 정원과 집, 그를 둘러싼 자연, 화목한 가족들을 보고 있는 눈.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비명, 소름 끼치는 기계음을 듣고 있는 귀.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을 감지하고 있는 사람은 극 중에서 몇 되지 않는다. 아직 감각이 예민한 갓난 아기만이 끊임없이 울며 소음과 악취로 인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후로 갈수록 벽 안과 밖의 대비는 극명해진다. 강에서 한적하게 낚시와 수영을 즐기는 가족과 그 옆에 떠내려오는 유대인들의 뼈와 재. 수영장에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과 아우슈비츠에 도착하는 열차의 매연. 벽 뒤의 매연은 여러 차례 등장하며 학살될 유대인들이 계속 실려져 들어오고 있는 현실을 암시한다.

 사람들을 불태우며 새까만 밤을 밝히는 수용소의 불빛. 분명 내게 주어진 것은 청각과 시각뿐인데, 마치 코에서도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듯하다. 매캐함에 숨이 막힌다. 스릴러와 고어물의 웬만한 장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데, 아무런 직접적 연출도 보여주지 않는 이 영화가 그 무엇보다 잔인했다. 영화를 보고난 아직까지도 속이 메스껍다.



 영화의 마지막이 가장 인상 깊었다. 검은 화면에 캐스팅보드가 올라가며 찢어지는 듯한 음악이 깔린다. 음은 점점 고조되고 상승하는 형태로 처음의 장면과 유사하면서도 대조된다. 그 음이 너무 기괴하고 공포스러워 도저히 마지막까지 들을 수 없었다. 가스실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유대인들의 공포가 이랬을까 싶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해 잘 표현한 영화였다. 사람들은 악인이 무엇인가 특별히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루돌프 회스는 350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유대인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다정한 평범한 가장이기도 했다.

 영화의 초중반부에 솔직히 지루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상한 소리들이 거슬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귀가 적응한 것이다. 완전한 제삼자의 시선에서 오랫동안 가족들을 관찰하는 동안 졸음마저 몰려온다. 그러다 불현듯 소름이 돋았다. 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료함을 느끼는 나 스스로가 너무 끔찍했다. 악이 얼마나 평범한 일상으로 존재하는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얼마나 그것에 무던해지고 무심해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신념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누구던 악인이 될 수 있다. 직접 악인이 되지 않더라도, 끔찍한 것들을 벽 하나 사이에 둔 채 이기적인 천국에서 거짓된 평화를 즐기는 동조자 혹은 방임자가 될 수 있다.

 나는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니더라도 함께 인지하고 함께 아파하고 곁에 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아야 한다. 아니, 오감을 모두 이용하여 최선을 다해 느껴야 한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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