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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4(주비리-팜플로나)

2024년 7월 31일

by 소로




생각해 보니 주비리에서 M, K님 부부를 만났는데 이전 일기에 깜빡하고 적지 않았다. 내 방은 꼭대기(3층)에 위치해 있어서 무척 더웠다. 8시가 되어도 열기가 꺾이지 않았다. 버티다 못해 공용 공간으로 내려갔다가 M, K님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M님은 내가 오늘 이곳에 묵는다고 했던 걸 기억하고 나를 찾아 돌아다녔다고 했다.(내가 2층 침대에 누워있는 바람에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꽤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동갑이었고, 한국에서 살던 곳도 멀지 않아 친밀감이 느껴졌다. 순례길에 오게 된 계기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부터 연애와 결혼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까지도 오갔다. 나는 처음부터 직업과 이름을 밝혔던 터라 괜찮다는 판단이 드는 이야기까지만 나누었다. 깊이 있게 대화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더 좋은 분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한 진지하고 무거운 생각들을 풀어놓으며 조금 머쓱해하던 나에게, 자신들의 이전 까미노 경험을 공유하며 공감도 해주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가 테라스에 있는 빨랫줄을 발견했다. 나는 빨래 너는 곳이 실외에도 있는 줄 모르고, 1층의 습하고 어두운 실내에 널어놓은 터였다. 황급히 가지고 올라와 다시 널었다. 한참 전 빨아 널어놓은 옷들은 아직까지 축축했다.








주비리-팜플로나까지 20.4km(2024.7.31.)




아침이 되었다. 결국 덜 마른 빨래를 주렁주렁 옷핀으로 가방에 매달고 출발했다. 6시쯤 나왔고 아직은 별이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별이 보이는 새벽하늘.



분명 헤드랜턴을 착용했는데도 밑을 제대로 보지 않아 웅덩이에 발이 빠져버렸다. 내 신발은 샌들이었기에 양말이 푹 젖어버렸다. 문제는 남은 한 쌍의 양말마저도 축축한 채 내 가방에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맨발에 샌들을 신고 걷기로 했다.



공장의 불빛과 소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생각난다.
순례길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동이 터오는 시간.




공장을 지나치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잠시 헷갈렸다. 표지판 앞에서 고민하고 있던 중 이탈리아 아저씨 '큰' Marco를 마주쳤다.(추후 '작은' Marco도 나온다.) 그는 쿨하게 길을 알려주고는 잰 걸음으로 앞장섰다. 이탈리안 디너파티까지 함께하게 될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갈대를 헤치니 작은 오솔길이 보였다.
혼자 여행하다 거울을 만나면 꼭 찍는 샷.
예쁜 색의 열매들.




걷다가 한국인 부녀를 다시 마주쳤다. 아버님은 여기 사과나무가 있다며 따서 먹어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혼자였으면 전혀 모르고 그냥 지나갔을 텐데, 역시 어른들 곁에 있으면 항상 콩고물이 떨어진다.(?) 이후에도 사과나무는 지칠 때쯤 선물처럼 등장해 내게 힘을 주었다.




본격적으로 해가 내리쬐기 시작했다. 11-12시부터는 더워지기 때문에 그전에 최대한 많이 걸어놔야 한다. 너무 더울 땐 풍경이고 뭐고 눈에 뵈지도 않는다. 오전만큼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걷고 싶지만, 오후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하는 한여름의 순례길이었다.


오늘은 까미노에서의 첫 대도시 팜플로나로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다. 팜플로나는 중세 스페인에 있었던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고, 공항까지 가지고 있는 큰 도시다. 나는 이곳에서 이틀 연박을 할 계획이었다. 맥주도 마시고 하루 푹 쉬면서 회복을 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가끔 이렇게 물가도 만나고,
공원도 만난다. 친절한 동네 주민들이 "부엔 까미노~" 인사해준다.
사진만 봐도 덥다.




대도시 전에는 필연적으로 도로가를 걷게 된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런 구간을 싫어한다. 옆으로 큰 차들이 지나다녀 위험하고, 그늘도 없는 콘크리트 위를 걷는 것은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진이 마음에 든다. 길 위의 나.




그렇게 팜플로나 초입에 도착했다. 팜플로나는 큰 도시이므로, 도착해서도 중심부로 들어가기까지 한 시간 가량 더 걸어야 한다.




고기보다는 생선이 먹고 싶어서 구글 리뷰를 찾아보다가 외곽으로 조금 빠져 있는 가게를 찾아갔다. 한국인 리뷰로 생선이 든 수프가 맛있다는 평이 있었다. 영어가 잘 되지 않는 사장님과 번역기와 손짓 발짓을 이용해 주문을 했다. 바깥 테이블에 앉아 한낮의 식사를 즐겼다. 스페인은 한여름 땡볕이어도 그늘에 앉아있으면 전혀 덥지가 않다.

구글 리뷰 만큼 맛있지는 않았지만, 주인이 친절해서 좋았다.




앉아서 보니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하나 잡혀 있었다. 맨발로 7시간을 걸은 탓이었다. 걸을 때는 양말이 없으니 시원하고 좋았는데. 마찰이 커지면 물집이 생긴다는 과학적 근거(?)를 직접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식당을 나와 다시 도시 중심부를 향해 걷다가 이탈리아 친구들 세 명을 만났다. 어쩌다 이곳을 알게 되었냐고 묻길래, 애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했더니 반가워하며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동거는 언제 할 계획인지, 한국에서의 삶이 어떤지 등등. 나는 솔직히 쉽지 않고 직업 상 특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들과 조금 더 대화를 해보고 싶었으나 서로 숙소가 달라 금방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나는 대도시.







Hostel Casa Ibarrola(사립 알베르게)


숙박(아주 간단한 조식 포함) 약 38,000원


https://maps.app.goo.gl/Wtu9NrgfnMFVffaX9




여기서만큼은 편하게 쉬고 싶어서 호텔은 아니더라도 조금 비싼 알베르게를 예약해두었다. 체크인을 도와주는 봉사자분은 굉장히 친절했다. 2층 침대였지만 침대마다 블라인드, 조명, 콘센트도 있고 에어컨도 24시간 켜져 있었다. 정말 편하고 시원하고 깔끔한 숙소였다.(이번 순례길에서 에어컨 있는 숙소가 여기밖에 없었던 거 같다.) 묵는 사람도 나를 제외하고 두세 명쯤 있었던 것 같은데, 침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프라이빗하게 쉴 수 있었다.

너무 좋았다..




샤워와 빨래를 마쳤다. 첫날 사서 가지고 있던 콤피드를 물집 위에 붙인 후,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

성당인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별로 아쉬움이 없다. 이 여행을 통해 내가 건물~유적지~ 이런 쪽에는 별 감흥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https://maps.app.goo.gl/7bT6tF8rooAfGQBG6


이미 팜플로나 맛집으로 유명한 이곳. 가게 안은 현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깥 자리가 하나 났길래 짐을 올려 맡아두고 주문을 하러 들어왔는데, 이쪽은 그런 문화(?)가 없는지 음식을 들고 왔더니 다른 사람들이 내 짐을 옆으로 밀어두고 앉아 있었다. 이래저래 말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가게 안으로 들어와 바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직원들은 많이 바빠 보였음에도 불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QR코드를 통해 영어 메뉴판을 확인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주문을 하기까지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정확한 메뉴명은 기억이 안 나지만, 미트볼과 양송이 구이를 주문했다. 타파스는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데우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순례길에서의, 그리고 스페인에서의 첫 타파스와 크래프트 비어였다. 유명한 만큼 맛은 기가 막혔다. 한 입, 한 입을 천천히 음미하며 알딸딸한 행복을 만끽했다.

아직도 이곳의 타파스 맛이 입안에 맴돈다.




기분이 좋아진 채 대도시의 거리를 거닐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팜플로나에서는 중국 마트에서 한국 라면을 살 수 있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혹시 생각날 수도 있으니 미리 쟁여놓기로 했다.

https://maps.app.goo.gl/sCGdHY6mVLfpxggt5



봉지로 된 까르보불닭, 신라면을 한 개씩 샀다. 마트 안을 구경하다가 과일이 땡겨서 청포도 한 송이, 납작복숭아 한 개를 함께 샀다. 이미 취기가 좀 있었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에 맥주도 한 캔 샀다.



숙소로 들어와 침대에서 과일과 맥주를 먹었다. 모처럼 빵빵한 에어컨 아래서 뒹굴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밀린 유튜브도 보고 노래도 들으며 자유로움을 한껏 즐겼다.

SE-93a7c671-6256-43e9-b10c-03fffa812bd5.jpg?type=w3840 장 보고 돌아가는 길.












그때의 메모를 보니 몸이 깃털 같다고 적혀있다. 걷는 데 속도도 붙었고 가방의 무게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바랐던 대로 혼자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도 되어있다. 걸은지 3일 만에 완전히 적응한 것이다. 이곳에 와서 보니 나는 적응력이 참 빠른 사람이다. 어떤 상황이든 그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한국에서는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겠을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이런 모습, 또 어떨 때는 저런 모습.. 누군가와 함께 있느냐,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발현되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해서 가끔은 고민스럽기까지 했었다.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나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나.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지금의 애인과 같이 항상 한결같은 사람, 자신만의 줏대가 있는 사람에게 끌렸던 것 같다.


하지만 순례길에 와서 보니 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함과 유연함 자체가 바로 나였다. 가지지 않은 면을 그런 '척' 연기하는 것이라면 문제겠지만, 나의 내면에는 실제로도 굉장히 다양한 면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저 그때그때마다 가장 필요한 것을 꺼내어 상황에 적응하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마치 포켓몬의 메타몽처럼..)


원래 계획대로라면 하루 더 팜플로나에 있어야 했지만, 쾌적하고 프라이빗한 숙소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고 대도시의 바이브도 충분히 느꼈다. 오늘 하루로 그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 느낌이었다. 기존의 계획을 바꿔 내일도 걷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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