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9일, 10일
6시 반에 기상해서 조식을 먹었다. 조식 역시 세 가지 종류의 수제 잼과 요거트 등 푸짐하고 정성스러웠다. 독일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통역을 받는 건 여전히 편치 않았다.
악몽을 꿨다. 보건실에 고열이 펄펄 나는 아이들이 왔다. 빨리 해열제를 줘야 하는데 어렵게 찾은 약에는 복용량이 적혀있지 않았다.(아이들은 kg당 복용량을 맞춰서 줘야만 한다) 그 사이에 보건실은 사람들로 시장통처럼 북적거렸고 웅성웅성하는 통에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일어나니 목, 어깨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순례길이 끝나며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는 부담감이 투영되었던 것 같다.
버스 탑승 예약은 8시였다. 대화를 하는 것도 피곤하고 주인 할머니도 불편해서 체크아웃 시간보다 빨리 나왔다. 어제의 바에 앉아 E님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계획을 정리했다. 오늘 부르고스에서 하루 묵고 내일 바로 마드리드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깔끔한 호텔이 그리웠다.
E님이 나왔다. 버스정류장으로 5분 정도 걸어 이동했다. 유럽 아니랄까 봐 버스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15분 정도 기다렸던 것 같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손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추웠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30~40분쯤 갔을까? 우리는 잘못 내려버렸다. 부르고스가 워낙 큰 도시라 헷갈렸던 것이다. 구글맵과 근처 상점 주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숙소 앞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체크인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이 있었다. 온 순서대로 가방을 늘어놓고 쉬고 있었다. 우리도 맨 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앞에 있는 카페에서 뺑오쇼콜라와 커피를 시켰다.
한국인들과 자연스레 합석하게 되었다. 30대 후반의 S님, 20대 초반의 자매가 우리 자리에 함께 앉았다. 그동안의 여정을 공유하며 커피를 마셨다. 근처에 한식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다.
https://maps.app.goo.gl/SwiA9K2iNx99WhQ37
체크인이 열리고 각자 침대를 잡은 후 다시 만나 한식집으로 향했다.
https://maps.app.goo.gl/pEfx8mbgbvmVkJsU7
음식들은 하나같이 기절하게 맛있었다... 실제로 기가 막힌 맛이었던 건지, 오랜만에 외국에서 먹은 한식이라 그렇게 느껴진 건지. 여러 명이 간 덕분에 다양한 메뉴를 나눠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비빔밥,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제육볶음, 라볶이를 먹었다. 계산해 보니 1인당 14유로밖에 되지 않았다. 인스타 스토리에 사진을 올리자 중국인인 Star가 간절하게 어디냐고 물어봤다(ㅎㅎㅎ) 위치를 알려주고 메뉴까지 추천해 주었다.
자매는 숙소로 들어가고 E님, S님과 부르고스 대성당을 가게 되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야외 테이블은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https://maps.app.goo.gl/zaV2p9LFQ6oh2iKk6
입장료를 내고 성당에 들어갔다. 만나본 중 가장 큰 성당이었으니 볼거리가 많았다. 열심히 구경은 했지만 건축물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점점 졸려졌다.
구경을 마친 후 숙소에 들어가 빨래부터 했다. 미리미리 해야 마를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한두 시간 정도 깊게 낮잠을 잤다. E, S님과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만났다.
https://maps.app.goo.gl/zCRwk8jJsDd4vJsVA
이 집에서 약간의 인종차별을 겪었다. 스페인어를 못하니 영어로 주문할 수밖에 없었는데, 직원 입장에서는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어찌저찌 주문을 해서 먹기는 했지만 가게 안은 후덥지근했고 직원의 태도 때문에 기분이 다운된 우리는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지금 리뷰를 보니 친절하다는 말이 많은데.. 그 당시 일하던 직원이 유독 불친절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S님이 봐둔 가게가 있다며 다른 데 가서 다시 기분 좋게 저녁을 먹자고 했다. 샹그리아가 맛있는 곳이라고 했다.
https://maps.app.goo.gl/TpdPXesYzHSwgmbR7
샹그리아와 플래터는 정말 맛있었다. 지금도 상큼하고 시원한 상그리아의 맛이 떠오른다. 자리가 없을 정도로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E, S님과 편하고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다.
부르고스 정도의 큰 도시에서는 순례자들이 연박을 하며 쉬는 경우가 많기에 아는 얼굴들을 꽤나 볼 수 있었다. 프랑스인 변태 Emmanuel도 그중 하나였다. 앉아있는 나에게 와서 Oh, Lee~~ 하며 반갑게 아는 체를 하길래 웃지 않고 인사만 했더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갔다. E, S님에게 내가 당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 후 나는 숙소로 들어왔고, 약국을 들렀다 온다던 E, S님이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어서 같이 맛있게 먹었다.
레토르트 파스타를 먹고 있던 Andy를 만났다. E님과 나는 입담이 좋은 Andy 덕분에 정신없이 웃었다. 그는 발 상태가 좋지 않아 곧 마드리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나 역시 내일이면 마드리드로 떠나니, Andy는 네가 원한다면 무료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곧 만나자며 왓츠앱을 교환했다. 한참을 떠들다가 열 시 반이 되어서야 침대로 올라왔다.
6시 되자마자 전체 점등이 되고 기상 알람이 나왔다. 정말 신박한 방식... 외국인들도 웅성웅성하면서도 킥킥거렸다.
새로운 날의 시작이 설레었다. 이제부터 정말 여행다운 여행이구나...!!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짐을 쌌다. 생장에서 산 등산 스틱은 필요한 누군가가 쓰겠지 싶어 로비에 두고 나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 앞 카페에서 E님과 빵과 커피를 먹었다. Andy와 Auritz가 합석했다. 또 Emmanuel이 우리 앞을 지나가길래 E님과 내가 떨떠름해하니까 Andy가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저런 "쓰레기"들은 순례길에 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Andy는 안 그래도 최근에 또 다른 변태가 여성 순례자를 성추행 했을 때, 여성분의 편을 들어 크게 싸웠었다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참 바른 생각과 불의에 맞설 용기를 갖고 있구나 싶어 마드리드의 여성들이 부러워졌다.(...)
일행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는 omio 앱을 통해 11시 반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근처 빵집에 들러 에끌레어를 사 와서 먹으며 기다렸다. 에끌레어는 목이 아플 정도로 달았다.
드디어 버스에 올랐다. 꾸벅꾸벅 졸며 2시간 만에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나의 순례길은 생장부터 부르고스까지 242.2km로 마무리가 되었다. 프랑스길의 1/3 가량 걸은 것이다. 아직 여행의 시간들도 남아있었지만, 순례길을 마친 마음은 이미 여행을 한번 끝내고 돌아온 듯 홀가분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부르고스까지만 간다는 내게 다시 와서 완주를 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왔다. 답은 "아니오"다. 처음부터 완주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시작하는 마음에서 적었듯, 낯선 곳에서 홀로 도전하는 내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나의 목적은 경험이자 성찰이었다. 2주간의 순례길은 새로운 나를 경험하고 기존의 나에 대해 성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길 위에서 매일매일 나에 대해 알아갔다. 타인을 관찰하고 가까워지듯,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더욱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국의 나와 이곳에서의 나는 완전히 똑같지도 다르지도 않았다. 사교적이고 모두와 잘 어울리는 나, 그리고 타인에게 맞춰준 후 가끔은 후회하는 나. 인내심과 끈기가 강한 나, 때문에 체력을 잘 살피지 못하고 한계까지 끌어쓰는 나. 사람 없이는 못 사는 나, 동시에 조용히 혼자 쉬는 시간으로만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나. 생각보다 강하고, 생각보다 섬세한 나.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 스스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해왔는가. 순례길을 마친 결론은, 나는 그 자체로 나라는 것이다. 양쪽 극단의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복잡미묘하고 그래서 매력 있는 나라는 한 인간. 그런 스스로를 한쪽으로 몰아 정의 내리려는 괴로운 노력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사랑해 주기로 했다.
돌아와 한 달이 지난 후, E님이 내가 놓고 간 스틱과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떠나고 내 스틱만이 완주를 했다니.. 신기하고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뒤이어 이어질 스페인 여행도 색다르고 행복한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순례길은 여기서 마무리되었지만, 남은 여행기 역시 꼼꼼히 기록해 두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