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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나

2025년 5월 23일

by 소로



아빠,


다정한,

솜으로 만들어주던 병아리 집.

혼낸답시고 손바닥 한 대 톡 치던 돌돌이 색연필.

백화점에서 사온 크리스마스 선물, 얼굴이 빨개진 엄마.

여유로운 주말 끓여주시던 소고기 라면.

엄마의 취향에 맞춰주던 외식 메뉴.

함께 공들인 방학숙제들.

계곡에 내리던 폭우, 굽이굽이 웃으며 도망치던 여름.

괴롭히는 애들을 패버리라던 말에 샘솟던 용기.

출근길 새벽 깨워서 차려주던 누룽지.

달고 예쁜 부분만 골라주는 과일.

입버릇처럼 하는 딸내미 자랑.



어려운,

새벽까지 늦어지는 귀가, 눈물 훔치던 엄마의 밤그림자.

침범할 수 없는 쪽방, 사라진 대화.

민망할 때 보이는 미숙함.

걱정의 탈을 쓴 통제 성향.

쿵쿵거리는 발과 욕을 읊조리는 입, 결국 깨지는 그릇.

강아지에게 하던 화풀이, 그저 짐승일 뿐이라던 잔인함.

은근슬쩍 돌리는 책임, 성찰 빠진 비난.

병든 엄마를 짐짝 취급하던 언행.

혐오적이고 시대착오인 거친 발언들.

타협 없는 대화, 좁힐 수 없는 간극.



불쌍한,

안경을 벗으면 쪼그라드는 눈.

뜨거운 음식 앞에서 흘리는 콧물.

밥알이 묻은지 모르고 오물거리는 입.

훌쩍거리는 숨죽임.

한 손에 잡힐 듯 쪼그라든 몸.

안 맞도록 헐렁한 옷을 걸치고 걸어가는 뒷모습.

쉬이 알아듣지 못할 때 얼굴에 스치는 당황.

어둠 속에서 조상에게 하는 간절한 기도.

모든 것을 쉽지 않게 만드는 노화.

그럼에도 매일 끌고 나가는 지친 몸뚱이.

도망가려는 자식 앞에서 삼키는 침묵.

애써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 해보는 마음.

가득한 주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녹록치 않았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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