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일기에서 나의 여정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서술했는데 그렇게 쓸 수 있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일 년 반 연애가 끝난 후 또 한 일 년 반을 정신 못 차린 채 지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끝난 연애에 관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분석을 마쳐야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게 내 성격상 그런 것인지 원체 사랑이 끝나고 나면 남들도 다 이렇게 정리할 시간을 가지는지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모든 실패에는 패인이 있고 패인을 알아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에서도 비슷한 사고를 한다는 것 역시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다.
번아웃된 에너지를 다시 끌어올리는 데까지는 몇 개월이 걸렸다. 직후에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혼자 차를 끌고 바닷가로 여행을 다녔다. 삼박 사일 여행이면 와인을 세 병 사서 갔다. 밤마다 와인을 한 병씩 비웠고 취한 채 울다가 잤다.
회복이 좀 된 후에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착한 내 친구들은 혼란 속에서 전애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나를 질려 하지도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느 정도 에너지가 올라왔을 때, 나는 또다시 그 에너지를 전애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일대일 만남도 수십 차례 하고 모임 같은 곳을 나가보기도 했다.
그럼과 동시에 웃기게도 마음은 혼자가 될 것에 대한 준비를 했다. 그때의 심정은 정확히 '나는 그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었고, 바뀌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데, 결국 행복하지 못했고 연애도 끝났다. 그러므로 그냥 나라는 인간은 글렀다. 누구 하나 불행하게 조지지 말고 혼자 살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을 좋아하는 내 기질이 어디를 가겠는가. 곁에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외로웠고 무엇보다 박살 나 조각조각 흩어진 내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다. 비혼 모임이나 여성인권 세미나를 참석하기도 하고 이쪽 모임을 나가기도 하다 보니 내가 좋다는 사람도 생겼다.
그렇게 다음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드는 사람인데, 안정적인 성격이었고 내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니 한번 만나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부터 돌진했던 이전 연애와 달리 다소 평탄하게 시작한 관계였다. 시작부터 내 마음이 크지 않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때의 나는 연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부분에서도 마음이 쉽게 곤두박질쳤고, 결국 오래 만나지 못하고 내 쪽에서 이별을 고하게 됐다.
참 신기하게도 삼십 대의 연애들은 짧던 길던, 얕던 깊던 간에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배움을 주었다. 이 연애에서 배웠던 것은 대충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관심을 표해서 연애를 시작했던 이십 대의 나는 이제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연애에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전 일기 초입에 묘사된 나와 비교하자면, 나라는 인간이 천지개벽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달아 두 번의 연애가 실패로 끝나고 나니,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혼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더 강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고, 나는 연애 생각 없으니 친구나 하자며 꾸준히 사람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잘 지내는 이쪽 친구도 두 명 생겼으니 참 운이 좋았다.
그렇게 재작년 겨울, 지금의 애인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상태말에 연애는 관심 없다는 문구를 적어놓은 사람들이었다. 무작위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참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이 많은데, 섬세하고 예의 있는 카톡이 마음에 들었고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처음 본 내 애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취향이었다. 원래 첫 만남에서는 커피만 마시고 헤어지는 것을 선호하던 나는(식사까지 하면 체할 것 같으니까) 애인과는 2차로 넘어가 술까지 마시게 됐다.
그날 나는 내가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란 것을 직감했다. 혼자 그렇게 느꼈다면 폭력적일텐데, 재미있게도 애인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명색이 친구나 하자고 만났던 우리는 서서히 조심스럽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애인과의 만남은 글을 쓰는 지금도 배실 배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했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우리는 서로 편안하고도 행복하게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사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레고 조각이 들어맞듯이 딱 맞는 관계. 누구 하나를 깎거나 욱여넣을 필요 없이 사랑하는 모든 과정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험난한 이전 연애를 통해 배웠던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법은 지금의 연애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애인은 소소한 나의 배려들을 알아차려주고 한결같이 고마워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의 방식을 배워서는 내가 준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전 연애가 나의 단점과 결핍을 직면하게 해주었다면, 지금의 연애는 나의 수많은 장점 하나하나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며 스스로가 좋은 사람임을 매일같이 느끼게 해주고 있다.
나는 건강한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봐왔다. 내게 없는 것을 상대에게서 배우고, 배울 수 없다 해도 그 자체로 보완이 된다. 방랑자 같던 내 애인은 나를 만나며 안정을 찾았다. 크고 멋진 전나무가 나라는 토양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이제서야 초여름을 맞이한 듯 모든 것을 흡수하며 힘차게 자란다.
건조하고 뜨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던 나는 애인이 가진 순수함과 청량감에 생기를 되찾았고, 힘들 때마다 그가 만들어주는 나무 그늘 아래기대어 앉아 달콤하도록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600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그동안 숨 쉬듯 서로 섞여왔다. 취미도 가치관도 성격도 식습관도 한 사람이 되듯 꼭 닮아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꼬여있는 인간'이라고 표현하는데, 애인은 그야말로 맑고 투명한 공 같은 사람이어서 나의 꼬임이 애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애인이 아무 생각 없이 퉁-하고 나의 삐딱함을 튕겨낼 때에 나는 머쓱해하며 꽈배기를 풀어내고 애인에게 폭 안기고야 만다. 이런 그의 담백함과 진솔함마저 나를 서서히 물들이고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나는 더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인간을 불신하고 사랑의 영원을 의심했던, 그러다 보니 삶에 대한 미련도 기대도 없던 내게 어느 날 선물처럼 다가와 사랑의 기쁨과 인생의 행복을 알게 해준 내 애인. 분명 미소 지으며 시작한 이야기였으나 그의 소중함과 감사함이 벅차올라 눈물로써 끝을 맺게 되는 오늘의 일기.
아래는 내가 애인의 첫 생일을 맞아 써준 편지에 인용된 시이다.
사랑의 발명 -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 2013년) 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다.
편지의 뒷 내용을 함께 남기며 길고 길었던 사랑에 관한 일기는 이만 마무리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자주 나눴던 말들이 있잖아, 삶이라는 게 그저 즐겁지만은 않다는 거. '사랑의 발명'과 작가의 생각을 읽으며 우리가 사랑에 빠지던 순간이 떠올랐어.
처음 OO가 내게 동질감을 느끼고 다가올 용기를 냈던 순간은 아픈 '우리'를 깨달았을 때였지. OO가 방황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연민하는 마음에 눈물짓던 나도 생각났어. 더 이상 무너뜨릴 것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만들어냈던 두렵고 힘찬 마음이 바로 사랑이었을 거야.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OO를 사랑하고 OO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해. 신을 믿지 않는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겠다는 결심을 믿으며 살아갔으면 해.
그래서 OO의 생일은 나에게 더더욱 의미 있고 감격스러운 날이야. 고통이었던 세상을 가로질러 이렇게 내 곁에 와줘서 고마워.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곁에 있어줄게. 매년 생일을 나와 함께 축하하자. 나와 맞는 첫 번째 생일 정말 정말 축하하고, 마음 깊이 사랑해!"